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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허연의 책과 지성] 캐릭터 하나가 절망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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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낸 첫 번째 무민이야.
모든 일은 직접 겪어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나가야 하고.

"우리가 늪을 건널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햇빛을 찾겠어?"

핀란드 현대사는 기구하다. 스웨덴과 소련의 지배를 받았고 잠시 독립을 누렸지만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그조차 끝이 난다. 2차 대전 때 핀란드는 동네북 신세가 된다. 사연은 이렇다. 소련이 지배욕을 드러내자 핀란드는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유럽은 '독일 대(對) 반독일' 구도였다. 독일과 싸우는 소련에 대항한 핀란드는 구도상 연합국의 공적이 됐다.

이처럼 암울했던 시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약한 조국과 좌절에 빠진 국민을 위해 한 여성 화가가 희한한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낸다.

화가의 이름은 토베 얀손. 그는 북극곰처럼 하얀색에 뚱뚱한 몸, 하마를 닮은 얼굴에 커다란 눈, 짧고 통통한 손과 발을 가진 난데없는 캐릭터 무민(Moomin)을 세상에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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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처음 무민이 나왔을 때 이 캐릭터가 훗날 세계인의 환호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얀손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얀손은 단지 핀란드 국민을 위로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도깨비와 자신이 좋아했던 동화 '이상한 나라 앨리스' '닐스의 이상한 모험' '정글북'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캐릭터와 무민 동화를 만들었다. 무민 시리즈의 시작인 '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는 무민 가족이 홍수를 이겨내고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물론 해피엔딩이다. 시리즈 속에서 무민은 항상 느긋한 자세로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는다. 시리즈 중 하나인 '무민의 겨울'에는 이런 독백이 나온다.

"무민이 혼잣말을 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낸 첫 번째 무민이야. 모든 일은 직접 겪어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나가야 하고."

사계절을 직접 겪어본 자만이 한 해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깊다.

얀손은 1914년 조각가인 아버지와 우표 디자이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문에 그림을 싣는 등 이름을 알린 그는 스웨덴과 파리에서 유학을 하면서 세계적인 화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전쟁과 내전이 발목을 잡았다. 핀란드 경제가 피폐해지자 얀손은 생계를 위해 정통 회화보다 일러스트에 매달린다. 스스로 '먹물 기계'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고달픈 나날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고달픔'이 무민 시리즈가 40년을 지속한 원동력이 됐다.

세월이 흘러 무민은 핀란드를 넘어 세계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됐다. 얀손은 소설, 연극, 노래, 시, 벽화,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욕을 불태우다 2001년 사망한다. 무민 시리즈에 나오는 대사 중 가장 오래 기억되는 구절이 있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일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요. 자, 지금부터 보물을 찾으러 가요."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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