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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패전 75주년 일왕의 '깊은 반성' 언급과 대비된 아베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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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8년째 종전기념사서 전쟁 반성 표현 없어
'적기지 공격능력' 감안 '적극적 평화주의' 언급
고이즈미 등 현직 각료 4명 야스쿠니신사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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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종전(패전) 기념일 75주년을 맞은 15일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참배객들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입장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도쿄=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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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5일 종전(패전)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지난해에 이어 과거 침략전쟁에 대해 ‘깊은 반성’을 언급했다. 반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8년째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책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적극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기온이 오전부터 30도 이상을 기록한 불볕더위 속에서도 태평양 전쟁 당시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는 참배객들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평화주의 노선 계승한 나루히토 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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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일왕과 마사코 왕비가 15일 도쿄 닛폰부도칸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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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일왕은 이날 도쿄 지요다구 닛폰부도칸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마사코(雅子) 왕비와 함께 참석했다. 정오에 맞춰 1분간 묵념한 뒤 기념사(오코토바)에서 나선 "전후 오랜 평화로운 세월을 생각하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깊은 반성 위에서 다시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며 "전쟁 가운데 쓰러진 분들에 대해 온 국민과 함께 추도의 뜻을 표하며 세계 평화와 우리 나라(일본)의 발전을 기원한다"고 했다.

지난해에 이어 과거를 언급하며 '깊은 반성'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일왕이 전몰자 추도식에서 깊은 반성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아키히토(明仁) 상왕이 일왕으로 재위하고 있었던 2015년부터였다. 나루히토 일왕은 역사수정주의의 기울어 침략 전쟁의 과거를 외면해 온 정치인들과 달리 아버지의 평화주의 노선을 계승한 셈이다.

아키히토 상왕이 '깊은 반성'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하기 전날이었던 2015년 8월 14일 아베 총리는 전후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아베 담화'에서 "후손들에게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더 이상 과거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지 않겠다는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처럼 '전후 세대'의 첫 일왕(나루히토)과 첫 총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침략전쟁 책임에는 눈 감는 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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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5일 도쿄 닛폰부도칸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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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는 이날 추도식 식사에서 "전후 75년간 일본은 일관되게 평화를 중시하는 길을 걸어 왔다"며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다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고, 이 결연한 다짐을 앞으로도 지켜나가겠다"며 "적극적 평화주의 기치 아래 국제사회와 손잡고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과제 해결에 지금 이상으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결의"라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1차 정권 때인 2006년 추도식에선 반성의 뜻을 밝혔으나 2차 정권 출범 이후인 2013년부터 8년째 일본의 침략전쟁이나 그로 인한 주변국에 대한 가해 책임에 입을 닫고 있다. 이는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 이후 역대 총리들이 주변국에 대한 가해 책임을 언급해 온 관행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대 총리들이 강조해 온 '부전(不戰ㆍ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의 맹세'도 2차 정권 이후 거론하지 않고 있다. 올해는 '역사와 겸허하게 마주한다' '역사의 교훈을 가슴에 새긴다' 등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 이번에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운 것은 최근 정부ㆍ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적기지 공격 능력 확보 논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교도통신은 아베 총리가 멀어지고 있는 과거의 참화에 대한 기억을 계승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군국주의 향수'에 젖은 우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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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군복 차림의 우익들이 15일 도쿄 야스쿠니신사를 주변에 나타나 '대동아전쟁은 성전' 등의 주장을 하고 있다. 도쿄=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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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야스쿠니신사에는 '포스트 아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환경장관 등을 포함해 현직 각료 4명이 참배했다. 현직 각료가 종전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것은 2016년 이후 4년 만이다. 4명의 각료가 참배한 것도 2차 아베 정권 출범 이후 가장 많았다.

아베 총리는 참배 대신 자민당 총재 명의로 ‘다마구시(물푸레나무 가지에 흰 종이를 단 것)’이라는 공물 비용을 보냈다. 그는 2차 정권 출범 1주년을 맞아 2013년 12월 야스쿠니신사를 전격 참배한 바 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의 강한 반발은 물론 미국까지 우려를 표하면서 이후 7년째 종전일과 춘ㆍ추계예대제에 공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최고기온 36도를 기록한 무더위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에도 야스쿠니신사에는 참배객들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우익의 성지'로 불리는 야스쿠니신사 주변에는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그로 인한 주변국의 피해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우익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군복 차림으로 일본도와 총을 들고 있었고, 이들과 기념촬영하는 시민들도 보였다. 이들 주변에는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다' '대동아전쟁은 성전(聖戰)' '일본 정부는 유약한 외교를 그만둬라' '헌법개정 자위군비' 등의 플래카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대동아전쟁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으로 패전 후 연합국총사령부(GHQ)가 사용을 금지했던 용어다. 이들은 신사 내부 스피커를 통해 생중계된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일왕의 기념사가 끝나자 일본 국기와 욱일기를 흔들며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했다.

일왕은 어두운 과거에 대해 '깊은 반성'을 언급하며 평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듣고 만세 삼창을 외치는 우익들은 과거의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었다고 모순적인 주장을 하는 꼴이다. 과거를 직시하지 않은 채 점차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 정치ㆍ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도쿄= 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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