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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더오래]‘금채소’ 호들갑에 농심은 멍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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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성주의 귀농귀촌이야기(76)



1987년 비가 오랫동안 많이 왔다고 한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 난다. 장마가 끝난 날이 8월 10일로 역대급 장마였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 장마가 그 기록을 깼다. 올해 장마는 중부지방 기준 지난 6월 24일 시작해 8월 11일까지 이어지면서 33년 만에 가장 늦게까지 장마가 이어진 해로 올라섰다. 단독 1위다. 앞으로 며칠간 더 올지 모르지만 확실하게 기록을 굳히는 모양새다.

비가 오는 것까지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많이 온다. 이번 장마에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으로 강원도 철원군을 꼽을 수 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처참하다. 일주일간 쏟아진 약 700㎜의 물폭탄으로 한탄강물이 범람해 일대를 덮쳤다. 철원의 유명한 명소인 고석정은 원래 한탄강 절벽 위에 자리 잡아 아래를 내려 보는 정자인데 고석정이 물 위로 간신히 나와 있을 정도였다. 범람한 물이 인근 마을 전체를 덮쳤다가 빠지면서 마을 농경지와 주택 대부분이 흙과 쓰레기가 엉킨 뻘이 되어 버렸다.

철원은 오이와 파프리카 농가가 많은데 이번에 하우스가 다 찢기고 날아갔다. 7월 중순에 심어 이제 막 꽃이 핀 오이는 수확이 불가능해 아예 새로 심어야 할 판이다. 철원 파프리카는 지역 경제에 효자 노릇을 했는데, 최근 판매가 어려지자 TV 예능 프로그램이 나서서 파프리카 판매 캠페인까지 벌였는데 아예 수확이 어려워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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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장마에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으로 강원도 철원군을 꼽을 수 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처참하다. 일주일간 쏟아진 약 700㎜의 물폭탄으로 한탄강물이 범람해 일대를 덮쳤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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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물에 잠긴 농가와 논과 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축산 농가도 근심이 크다. 가축들이 물에 떠내려가고 축사가 무너졌다. 비가 그쳐도 전염병이 돌까 두렵다. 코로나19로 위축된 농촌관광은 사정이 더 어렵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우리 마을로 오라는 소리도 못할 지경이다.

이렇게 큰 피해를 준 수해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면 역시나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이다. 단순히 장마가 길어진 것이 아니다. 올해 시베리아 지역에 굉장히 고온 현상이 발생했다. 1월부터 5월까지 평균보다 5도 이상 기온이 높았고 6월에는 10도 이상 높아졌다. 엄청나게 달아오른 북극은 빙하를 녹였고, 이상 고온 현상으로 인해 제트기류가 약화되며 북극의 찬 공기가 중위도로 내려왔는데, 여기에 동시베리아와 우랄산맥 부근에서 높은 고기압이 발생하면서 한국에서 저온 상태의 대기가 정체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쪽의 찬 공기와 만나 정체 전선이 자주 활성화된 것이다. 그래서 장마가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2019년 국립과학기상원이 발표한 ‘IPCC(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협의체) 6차 평가 보고서’를 보면 현재와 같은 ‘고탄소 사회’가 이어질 경우 21세기 말에는 동아시아 5일 최대 강수량이 29% 증가하고, 상위 5%의 극한 강수일수도 1.5배 증가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구온난화가 이번 장마와 같은 ‘지속적이고 강한 폭우’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정도라면 기후 변화가 아니라 기후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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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는 작년과 단순 비교하여 농산물 가격이 껑충 뛰었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수급 부족이 있을 수 있고 가격이 높아질 수 있지만, 농산물 가격은 무조건 낮아야 하는 기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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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농산물 가격이 오른다고 걱정이다. 상추는 금상추가 되었고 시금치도 금시금치가 되었다. 언론에서는 긴 장마로 채소값이 폭등했다고, 밥상 물가가 껑충 뛰었다고 보도한다. 배추 35.7%, 양파 39.9%, 상추 35.9%, 고구마 37% 등으로 폭등했다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추석이나 늦가을 김장철까지 ‘금값 농산물’ 현상이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농산물 수급 구조를 잘 모르고 하는 보도다. 작년과 재작년의 물가 동향만 보고 단순 비교한 것이다. 오히려 작년은 농산물 가격이 낮아서 농민이 애로가 많았는데 단순 비교해 물가가 껑충 뛰었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수급 부족 상황이 있을 수 있고 가격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은 무조건 낮아야 하는 기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시장 논리에 따라 가격이 널뛰는 주식은 괜찮고, 농산물은 무조건 값이 싸야 하는가. 가뜩이나 수해를 입은 복구를 시도하기도 전에 물가가 뛰었다고 호들갑을 떠니 농민의 가슴에 멍이 든다.

귀농한 지 4년 차가 되어 이제 농부티가 나는 충북 음성에서 복숭아 농장을 하는 A씨는 “도시에서 살면서 소비자였을 때는 농산물 가격이 왜 이리 비싸냐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농촌에 와서 생산자가 되어 보니 농산물 가격이 왜 이리 싸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니 애당초 농산물 가격이 어떤지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름 장마 때 채소값이 오르고 명절 때 과일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건데 왜 해마다 같은 소식을 접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지금 장마통에 복숭아 값이 떨어진 것은 왜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도시 사람들은 자기 생각만 한다. 수해를 입은 마을과 농장을 보며 가슴 아파하면서도 농산물 가격이 오른다고 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며 정색을 한다. 복숭아 값이 떨어진 이유는 긴 장마로 당도가 떨어진 것이다. 농사를 잘 못 지어서 맛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기상 재해가 원인인데 외면을 한다.

귀농·귀촌한 이들의 대부분이 음성의 A씨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농사를 직접 지어 보고 매장에 내다 팔아 보니 그동안 내가 정말 농산물을 싸게 먹었구나. 대기업은 막대한 수익을 내면 칭찬을 받고 농민은 수익을 내면 눈총을 받는구나.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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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재난 상황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업은 심각한 상황이다. 어떤 재난 사태가 나올지 모르는 기후 위기 속에서 농민들은 농사 짓기가 막막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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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기후 변화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재난 상황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업은 심각한 상황이다. 어떤 재난 사태가 나올지 모르는 기후 위기 속에서 농민은 농사짓기가 막막하다. 봄이면 밀려오는 미세먼지. 여름에 쏟아지는 폭우와 가뭄, 또다시 불어 닥치는 가을의 태풍, 그리고 겨울의 한파와 이상 고온, 변화무쌍한 기후 변화로 인한 재해가 일상이 된다면 농산물 수급은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농민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공적 자금은 이런 곳에 투입하는 것이다.

기후 변화로 재난 재해가 일어나는 것은 수긍하면서 재난 재해로 채소값이 오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모순도 해결되어야 한다. 지구가 죽어 가는데 채소값이 오른다고 짜증 낼 때가 아니다.

잠깐 TV를 켜 뉴스를 보니 배춧값이 껑충 뛰었다고 자막이 흐른다. 벌써부터 김장 걱정을 해 주니 참 친절하다. 친절해.

슬로우빌리지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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