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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빙상여왕 박승희, 인생 2막은 패션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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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새출발

쇼트트랙·빙속 거쳐 디자이너로

영국 여행 중 가방 디자인 눈 떠

브랜드 홈페이지 하루 1만 명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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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디자인한 가방 앞에 선 박승희. 박승희는 ’차근차근 열심히 해서 더 좋은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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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후암동 주택가 작은 골목길 안. 오래된 건물 사이로 하얀 벽, 투명 유리로 꾸며진 가게가 눈에 띄었다. 디자이너로 변신한 스케이터 박승희(28)의 사무실이었다. 쇼룸처럼 꾸민 벽에는 직접 디자인해 만든 가방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 브랜드 ‘멜로페(melope)’를 내놓은 박승희는 “1년 가까이 준비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뿌듯하면서 두렵기도 하다”고 했다.

박승희는 동계올림픽에 세차례 출전해 5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0 밴쿠버 올림픽 쇼트트랙에선 동메달 2개, 2014 소치 올림픽에선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냈다. 특히 소치 올림픽 때는 언니 승주(30), 남동생 세영(27)까지 삼남매가 함께 출전해 화제를 모았다. 2018 평창 올림픽에는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해 출전했다. 한국 선수로는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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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금메달을 따낸 박승희.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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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박승희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인 패션 디자이너다. 사실 박승희는 선수 시절에도 틈틈이 패션쇼를 보러 갔고,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옷맵시를 뽐냈다. 패션 디자인 관련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미래를 준비하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박승희는 “주변 사람들조차도 ‘은퇴하면 지도자를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싫었다. 지도자가 싫은 게 아니라 운동 외에 다른 길이 없을 거란 선입견이 싫었다. 17년 동안 스케이트를 탔으니까 관련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꿈을 좇아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순탄치는 않았다. 현역 시절엔 운동을 하면서 병행하는 정도였는데, 막상 패션 디자인을 본업으로 삼고 나니 이전에 없던 압박감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해 4월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 박승희는 “방황했다. 너무 힘들어서 손을 좀 놓고 있다가,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혼자 떠났다. 영국 남부 브라이턴이란 도시에서 6개월간 지냈다. 혼자서 지내며 외로워서 운 적도 많았다. 번아웃 증후군(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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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긴 했지만, 타지 생활은 약이 됐다.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박승희는 “옷 공부에 지쳐 있었는데, 그 곳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많이 그렸다. ‘가방을 디자인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몸이 아파서 조금 빨리 한국에 돌아왔다. 그 뒤부터 가방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고 했다.

열정을 되찾은 박승희는 지난해 10월부터 차근차근 움직였다. 직접 공장을 돌아다니며 제품을 만들고, 홈페이지도 제작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배송을 위해 포장도 직접 한다. 박승희는 “운동만 하다 보니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는데, 막상 부딪히니까 하게 되더라. 최대 하루 1만 명이 홈페이지를 방문한다. 처음 주문이 들어왔을 땐 ‘이게 진짜인가’ 싶었다”고 했다. 그는 “내 가방의 브랜드인 멜로페는 그리스어 멜로포니아(작곡법)에서 딴 이름이다. 어감이 좋아 선택했다. 자신만의 멜로디를 담는 가방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라고 했다.

박승희는 “신중하게, 오랫동안 준비했다. 아무래도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더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이름이 알려진 걸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박승희는 “언니(박승주)가 함께 일을 해서 든든하다. 사무적인 일과 홈페이지 관리 등을 언니가 해주고 있다. 회사가 커지고, 매출이 느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내 가방을 통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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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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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매 중 현역 선수는 막내 박세영 뿐이다. 박세영은 2017 삿포로 아시안게임 1500m 금메달을 따냈지만, 평창올림픽 선발전에서는 간발의 차로 티켓을 놓쳤다. 2022 베이징올림픽을 목표로 다가오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중이다. 박승희는 “동생이 관심도 안 보이는 척 하더니 ‘이름은 뭘로 정했냐’고 묻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한테 알리기도 하더라”며 “평창올림픽 때까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잔소리도 했는데, 요즘은 그러지 못한다. 열심히 해서 다음 올림픽에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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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로서 첫 걸음을 뗀 박승희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많았다. 디자이너도 되고 싶었고, 플로리스트나 연기자를 꿈꾼 적도 있다”며 “가방으로 시작했지만, 언젠가는 내 디자인을 담은 옷도 만들어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해설위원처럼 빙상과 관련한 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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