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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동토 시베리아가 38도 폭염…땅속 '좀비'들이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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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재앙 눈앞에 보다]


중앙일보

지난달 불에 완전히 타버려 잿빛 폐허로 변해버린 러시아 사하공화국의 빌류이스키 숲. 화재 직전 울창했던 숲에선 더이상 생명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 sred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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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러시아 동부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시 외곽. 야쿠츠크에서 차로 한 시간 걸리는 빌류이스키(Viluyskiy) 숲은 가도 가도 끝 없는 초록빛 나무로 가득했다.

하지만 중앙일보 의뢰를 받아 현지를 취재한 촬영팀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속살은 달랐다. 방재 관계자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숲 상공에 들어서자 발아래 풍경이 또렷이 드러났다.

숲 곳곳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나왔고, 이미 불타버린 시커먼 폐허들이 나타났다. 완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가 뿜어내는 연기는 구름처럼 하늘을 뿌옇게 뒤덮었다. 헬리콥터가 그 속으로 들어가자 위치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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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헬리콥터에 화재 진압용 장비를 싣고 있는 러시아 방재 관계자들. 이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불이 난 빌류이스키 숲으로 향했다. 사진 sred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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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현장에 투입된 소방대원들이 나무에 붙은 불씨를 꺼트려도 불은 계속 살아났다. 대원들은 화재 확산을 막으려 쉼 없이 삽질을 하면서 기다란 도랑을 팠다.

잿빛으로 변한 숲에서는 안개 같은 연기만 자욱하게 깔렸다. 몇 미터 차이로 화마를 피한 노란 잎 나무와 대비됐다. 빌류이스키 숲의 부관리자인 콜레소프 스뱌토슬라프는 “지난 5년간의 산불 발생 (추이와) 비교하면 지금 훨씬 많이 나고 있다”면서 “오랜 기간 비가 안 온 게 이유”라고 말했다.

인근 숲의 상황도 비슷했다. 빌류이스키 숲에서 차로 3시간 걸리는 곳에서도 붉은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후끈 달아오른 땅에 묻혀있던 불씨는 계속 살아나 나무들을 위협했다. 잔불 정리와 화재 예방 차원에서 트랙터가 돌아다니며 흙을 갈아엎었다.



혹한 대신 폭염, 135년만에 '역대급' 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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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러시아 시베리아 숲의 나무 사이로 붉은 화염과 하얀 연기가 퍼져나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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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과 동토의 상징이었던 시베리아가 빨갛게 불타고 있다. 기후 변화가 가져온 이상 현상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인 사하공화국 베르호얀스크의 기온은 올여름 38도(6월 20일)까지 치솟았다. 1885년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온도다. 원래 이곳은 한겨울 기온이 영하 50도 밑으로 떨어지는 추위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번 여름은 정반대의 폭염이 나타났다.

여기뿐일까. 절절 끓는 여름 날씨는 시베리아 전역을 덮쳤다. 유럽연합(EU) 산하 과학기구인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 서비스'가 6월 19일 시베리아 지표면 온도를 측정했더니 40도를 넘겨 붉게 표시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여름 평균 기온(15~18도)을 훌쩍 넘긴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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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 서비스'가 6월19일 촬영한 러시아 시베리아 지표면 온도. 대부분 지역이 40도를 넘겨 새빨갛게 표시됐다. 가장 추운 지역으로 꼽히는 베르호얀스크 기온은 다음날 역대 최고치인 38도까지 치솟았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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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기온 조짐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 서비스에 따르면 여름이 시작되는 6월 기온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3년간은 30년 평균치(1981~2010년)를 4도 이상 웃돌았다. 시베리아도 지구 온난화의 직격탄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영구동토의 여름은 해가 갈수록 더 뜨거워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역대급' 날씨가 찾아오면 토양은 점점 말라간다. 시베리아 지역의 눈 덮인 면적 비율은 올 5월까지만 해도 90%대였지만 6월엔 ‘0’으로 급감했다. 지난 30년간(1981~2010년)은 최소 10% 안팎이었다. 토양 1㎥에 함유된 수분량은 6월 들어 0.26㎥ 아래로 떨어졌다. 평년엔 0.3㎥ 이상 유지하면서 기울기가 완만하게 줄어든 것과 대조적이다. 영구동토가 사라지는 대신 기온이 높고 땅이 바싹 마르는 고온건조한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 서비스의 선임 과학자 마크 패링턴은 "높은 온도와 건조한 지표면은 화재가 넓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하는 데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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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하늘 위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러시아 사하공화국 빌류이스키 숲. 화마가 한번 휩쓸고 간 곳은 주변과 달리 검은색으로 변했다. 적지 않은 면적이 폐허가 됐다. 사진 sred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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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온건조한 숲 '화약고' 변신, 남한 1.4배 잿더미



결국 숲은 버티질 못했다. 시베리아 지역은 항상 화재가 나곤 했지만, 올해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에 따르면 올 들어 러시아 국토 22만㎢(8월 기준)가 불에 타버렸다. 이 중 14만㎢는 숲이다. 남한 면적의 1.4배에 달한다. 그린피스는 "불이 나도 대부분은 진화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러시아 당국이 (소방 인력 투입 등의) 경제적 실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시베리아의 광활한 삼림은 사람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준다. 아마존 열대우림처럼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숲이 불타면 반대로 온실가스를 내뿜는 '화약고'가 된다. CNN은 지난 6~8월 러시아 동부 지역의 화재로 발생한 이산화탄소량만 540Mt(메가톤)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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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7월 30일~8월 6일 일별로 촬영한 위성 사진. 시베리아 숲 화재로 발생한 대규모 연기는 마치 구름처럼 하늘을 가득 메웠다. 사진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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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숲에서 나오는 연기가 마치 구름처럼 시베리아의 하늘을 뿌옇게 덮어버렸다. 꺼진 듯 보이는 불씨는 땅속 깊이 자취를 감췄다 '좀비'처럼 자꾸 살아난다. 더 많은 화재, 더 많은 연기가 발생할수록 시베리아는 뜨거워지고, 지구 온난화는 빨라진다. 기온 상승→영구동토 해빙→대형 재난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멜니코프 동토연구소 연구부소장인 페도로프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는 "시베리아 숲에 화재가 발생하면 영구 동토층의 붕괴를 빠르게 가져오게 된다. 또한 영구 동토의 붕괴는 세계 최대 동토 도시 중 하나인 야쿠츠크에 사회경제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면서 "앞으로 지구 온난화가 이어지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화재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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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숲에선 화재 진압에도 불구하고 땅 속 불길이 끊임없이 살아나 나무를 태웠다. 사진 sred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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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고온, 미세먼지…한국도 위기 영향권



멀어 보이는 시베리아의 재앙은 결국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종성 포스텍 환경공학부 교수는 "시베리아의 온도 변화는 한국 기온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 곳에서 산불이 발생하면 미세먼지가 북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넘어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시베리아발(發) 기후 위기를 막으려면 적극적 개입이 중요하다. 한국도 비슷한 산불 문제가 곧 대두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국 교수는 "중국ㆍ러시아 접경인 남동 시베리아에서 불이 많이 나는데 중앙 정부가 멀리 있는 러시아 측은 방치하는 편이다. 러시아 정부가 비용을 따지지 말고 화재 관리에 나서야 하고, 전 지구적인 대응도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 교수는 "한국 역시 기후변화에 따라 산불 문제가 커질 것이다.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비가 많이 오긴 하지만, 앞으로 집중호우가 늘고 건조한 날은 더 많아지기 때문에 땅이 마르게 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종훈 기자, 김지혜 리서처·이수민 인턴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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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있는 시베리아 숲을 하늘과 땅에서 찍은 실감형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스마트폰으로 QR코드에 접속하면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상이 보이지 않으면 주소창에 (https://youtu.be/LCzj-GBL6Qk)를 입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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