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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옆집 아저씨 용서" 피해소녀 문자 거짓…판사는 1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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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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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저씨 용서해 줄게요.”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이웃집 남성 A씨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한 아이. 사건 당시 12살이었던 B양이 피해자 변호사에게 보낸 이 문자메시지를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진정한 B양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1심에서 피해자와의 합의가 반영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던 A씨는 2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3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도 B양의‘처벌불원’ 의사를 감경사유로 인정하지 않은 2심의 판단이 옳다고 보고 이를 확정했다.



12살 여아 강제추행…1심 집유



A씨의 강제추행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12세에 아동에 불과한 B양의 옷을 벗겨 신체를 핥았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 B양을 억지로 자신의 집에 데려가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A씨는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13세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으로 재판을 받았다.

1심은 A씨의 죄질이 좋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 범행으로 B양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다만 A씨가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피해자와의 합의로 B양이 A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을 A씨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평가했다. A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B양의 ‘처벌불원’은 진정한 ‘처벌불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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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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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건을 넘겨받은 2심은 1심과 다른 판단을 했다. 항소심은 과연 B양의 ‘처벌불원 의사’가 진정한 B양의 의사인지를 꼼꼼하게 따졌다.

성범죄 양형기준에는 양형에 미치는 요인이 종류별로 나뉘어 있다. 법원이 어떤 형량 범위 안에서 피고인의 형을 정할 때, 형을 가중할 요소와 감경시킬 요소를 미리 구분해놓고 지침으로 삼는 기준이 양형 인자다. 예를 들어 ‘피해자의 처벌불원’은 특별양형인자 중 감경요소에 해당한다. 피고인과 피해자가 합의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법원에 제출하면 법원이 피고인의 형을 깎아주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양형기준은 권고적 효력을 갖지만 적용대상이 되는 범죄에 대해서는 대다수 판결이 이를 따른다.

항소심은 성범죄 양형인자의 ‘처벌불원’은 상당히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피고인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합의를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하는지, 피해자는 처벌불원의 법적ㆍ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는지 등 말이다. 특히 피해자가 미성년자거나 장애인, 친족 등일 때는 더 세밀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B양 마음을 찬찬히 읽은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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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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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이 이를 따지는데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B양은 사건 초기 수사기관에서는 A씨의 처벌을 바란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다 1심이 끝날 때쯤 B양의 아버지가 A씨로부터 손해 배상금을 일부 받았고 딸을 대리해 합의서를 써줬다. 처벌불원서는 1심에 이어 2심에도 냈다. 하지만 항소심은 B양이 이 합의를 용인했다고 볼만한 사정이 없다고 판결했다.

B양은 변호사에게 “옆집 아저씨 용서해 줄게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항소심은 B양의 진짜 마음을 알기 위해 당사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B양을 직접 면담했다. 그리고 법원은 “사건을 빨리 끝내길 바라는 주변의 압력을 의식해 이뤄진 것(합의)으로 실제 속마음은 피고인의 처벌을 바라는 마음에 가까워 보인다”는 결론을 냈다.

B양은 사건 이후 이성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어려움을 겪는 등 사건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A씨는 합의를 계속 요구했고, B양은 스스로 판단이 어려워 피해자 변호사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항소심은 “항소심에 처벌불원서를 제출하기 직전, 피해자가 느낀 심리적 부담감과 곤경으로 볼 때 이 ‘처벌불원’ 의사는 진실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오히려 항소심은 A씨에게 실형이 불가피하다고 판결문에 썼다. 어린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일수록 피해자가 이를 극복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리고, 법원은 이에 엄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은 “피고인이 말하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여부와 상관없이 피고인에게 실형 선고는 불가피하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A씨의 형은 이달 3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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