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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동아플래시100]경성 기생→단발 미인→영화배우, 강향란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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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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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내 몸과 터럭,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하며 긴 머리카락을 애지중지했던 우리 선조들에게 1895년 11월 15일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겁니다. 고종부터 모범을 보였습니다. 공포일 새벽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내부대신 유길준을 불러 자신과 태자의 상투를 자르게 했습니다. 일본의 입김으로 강요된 단발령은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나라의 명맥을 끓는 것이라고 여긴 유생과 민중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단발은 점차 대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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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의 강향란. 단발하기 전의 모습이니 경성 누하동에 있던 배화여학교에 다니던 때로 보인다. 사랑하는 청년을 만나 장래를 언약한 뒤 부푼 꿈을 안고 학업에 정진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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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성의 머리모양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대로였습니다. 여성의 ‘삼단 같은 머리채’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요조숙녀, 현모양처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결혼하기 전에는 길게 땋은 편발, 결혼 후에는 땋은 머리를 틀어올려 비녀를 꽂은 낭자(쪽진 머리), 게다가 머리숱이 많아보이도록 덧넣은 월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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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아픔을 극복한 뒤 당당하게, 남자와 똑같이 살아보겠다며 단발하고 남장을 한 강향란. 배화여학교는 단발한 여자는 다닐 수 없다고 해 서대문 정칙강습소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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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22년 6월 22, 24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단발랑’, 즉 단발한 낭자라는 기사가 ‘나비효과’를 일으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경성 화류계에서 이름난 젊은 기생 강향란은 부유한 청년 문사를 만나 장래를 약속하고는 기적(妓籍)을 내던지고 여학교에 다니며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남자의 변심으로 절망해 자살을 기도합니다. 한강철교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극적으로 구조된 그는 목 놓아 울다 굳게 결심합니다. “남자에 의지하고 동정을 구하는 것부터 글렀다. 나도 사람이다. 남자와 똑같이 당당하게 살아야겠다.” 곧바로 곱게 길러온 머리를 싹둑 자른 강향란은 남자 양복까지 갖춰 입고 주체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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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영화배우로 데뷔한 강향란. 단발한 뒤 다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중국, 일본 등지로 떠돌아다니다 ‘봉황의 면류관’이라는 작품에서 아주머니 역을 맡았지만 배우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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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길거리 변사가 흥미진진한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문체로 써내려간 이 기사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강향란은 보수층의 비판과 진보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일약 명사가 됐습니다. 한동안 그의 소식이 끊기자 “강향란의 근황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는 독자도 적지 않을 정도였죠. 동아일보는 이에 1925년 9월 3일자 ‘독자와 기자’ 란을 통해 그가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를 오가며 여성운동에 힘썼고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후 강향란은 호구지책으로 잠시 영화배우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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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해외만평 ‘여자의 세상’. 골프 치는 남녀의 등에 큼지막하게 ‘남’, ‘여’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여자의 단발이 대유행이 되면 골프구락부원은 이렇게 해서나 남녀를 구별할까?’라는 설명이 그때까지도 여성의 단발에 대해 보수적인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강향란은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몰고 왔습니다. 몇몇 기생은 그를 모방하듯 더 이상 이런 생활을 계속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단발을 했고, 일부 신여성들도 동참했습니다. 1924, 25년은 여성 단발이 유행하기 시작한 때인데, 1925년 8월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이자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가인 허정숙은 당시 그를 포함해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로 불렸던 주세죽, 고명자와 함께 단발하며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여성 단발에 대한 찬반 논쟁도 뜨거웠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신문지상을 통해 설전을 벌였고, 1926년 1월엔 경성 중앙청년회관에서 ‘현대 여자의 단발이 가(可)? 부(否)?’라는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찬성하는 쪽은 주로 머리단장에 드는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능률과 위생에 좋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연간 100원의 수입을 올린다고 할 때, 1000만 조선 여성이 모두 단발해 단장시간을 하루 30분 아껴 이를 노동에 제공하면 국가 전체로 월 500만 원(현재가치로 약 450억 원) 이상을 벌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반대파는 단발은 일종의 유행병이요, 서양 숭배이며, ‘시간경제’ 운운하는 것은 게으른 자의 변명이라고 맞섰지만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강요된 인습에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트렌드 세터’ 강향란은 영화배우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지만 지난해 여름 음악극 ‘낭랑긔생’의 주인공으로 다시 살아나 용기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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