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스브스夜] '비디오가게' 윤상,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영원한 마왕' 故 신해철을 기억하는 이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SBS 연예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여전히 신해철을 기억하는 이들, 그들이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7일에 방송된 SBS '선미네 비디오 가게'에서는 두 번째 주인공 가수 신해철에 대해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서 비디오 가게를 찾은 이는 신해철의 절친이었던 가수 윤상. 그는 "이 자리에 맞는 게스트인지 자신은 없지만 불러주셔서 찾아왔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신해철이 주인공이 된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선미는 "나도 그렇고 내 또래들은 신해철 선배님에 대해 자세히 잘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강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라며 "여전히 강렬한 기억을 남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두 번째 주인공으로 선정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윤상은 "그 친구가 떠난 지 벌써 6년, 20대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친구인데 이 기회를 빌어서 내가 겪은 신해철이라는 친구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라고 친구 신해철을 주인공으로 선정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신해철에 관한 인생 비디오를 함께 플레이했다.

신해철의 시작은 강렬했다.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의 리드보컬로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던 신해철. 이에 배순탁은 "그 곡을 듣는 순간 우리 모두 저 곡이 대상이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선미와 윤상은 데뷔 당시 신해철을 보며 "저 때만 해도 꽃돌이, 꽃미남이었다"라며 미모에 감탄했다.

김태원은 신해철에 대해 "편곡 수준도 높았고 실험적인 연주와 노래까지 할 수 있는 친구는 그 친구가 처음이었을 거다"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홍경민은 "단순한 전주인데 임팩트가 엄청났다. 그 음악이 가지는 힘은 아직도 엄청나게 커서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그대에게'에 대해 말했다.

22살 대학생 신해철이 만든 '그대에게'는 훗날 국민 응원곡이 되었다. 신해철 본인도 이 곡이 그렇게 오랜 생명력을 가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신해철은 1990년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로 솔로 데뷔를 한다. 이에 윤상은 "나보다 6개월 정도 먼저 솔로로 데뷔를 했다. 같은 해에 데뷔를 해서 소위 말하는 데뷔 동기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나는 가수 데뷔 이전에 인기가수들에게 곡을 준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 친구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고, 난 88년 대학가요제로 그 친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너냐 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라고 설명했다.

예쁜 외모로 사랑을 받았던 아이돌 스타의 원조 신해철의 1집은 큰 사랑을 받으며 숱한 시상식에서 여러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낯설었던 랩을 곡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에 양동근은 "안녕이라는 곡 속의 랩은 저도 어렸을 때라 영어 가사의 의미를 모르고 따라 불렀다. 그런데 후에 힙합을 하고 다시 들여다보니까 와하게 되는 가사더라. 랩을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알고 쓰신 분이었다"라고 말했다.

1집 앨범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신해철. 하지만 그는 하드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92년 다시 밴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에 배순탁은 "모두가 반대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의 뿌리는 밴드니까 반드시 그걸 해내겠다는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김태원도 "솔로를 하다가 성공을 했는데 다시 밴드로 돌아가는 케이스는 없다"라며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던 신해철에 대해 말했다.

신해철은 1992년 밴드 N.E.X.T를 결성하고 '도시인'을 발표한다. 이에 양동근은 "<인형의 기사>를 제일 좋아했다. 그리고 그다음 곡이 <날아라 병아리>였는데 노래 가사와 내용이 충격적이었다"라며 그의 음악을 회상했다. 페퍼톤스의 신재평은 "테이프가 늘어질까 봐 냉동실에 넣어 두고 들었었다. 당시 학교에서 넥스트 전도사로 불렸다"라고 했다.

배순탁은 N.E.X.T에 대해 "최후의 공룡 락밴드. 메인 스트림의 느낌을 줬던 유일한 밴드다"라고 평가했다. 넥스트의 기타리스트였던 김세황은 '라젠카 세이브 어스'에 대해 "당시 국내에서 가요 앨범에 오케스트라가 들어가는 것은 없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외국으로 가서 오케스트라 녹음을 했다"라며 "투자 대비 엄청난 성공을 거둔 유니콘 밴드였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넥스트 음악에 대해 많은 동료들은 "뭘 좀 안다면 들어야 하는 음악이었다"라며 "신해철은 새로운 것에 대해 완전히 열려있는, 장르적으로 그 처럼 자유로운 이는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이에 윤상도 "엄정화의 눈동자라는 곡을 프로듀싱했는데 넥스트의 리더가 만들었다기에 괴리감이 큰 곡이다. 그리고 이승기 1집에도 프로듀싱을 했고 넥스트와 결이 완전히 다른 전람회 1집도 신해철이 프로듀싱했다"라며 "그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은 음악인이었고 신해철이었기에 가능했다"라고 했다.

훗날 신해철은 윤상과 노땐스라는 테크노 밴드를 결성했다. 당시 세계적인 사운드 엔지니어까지 가세했던 '노땐스'의 앨범에 대해 윤상은 "해외 음악과 비교했을 때 뭐가 부족한지 찾아봐라 라는 마음으로 음악을 했다. 갈 데까지 가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했던 작업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음악 장비들 때문에 호텔을 빌려 앨범 작업을 했는데 훗날 호텔비로 엄청난 제작비를 자비로 탕감했다는 웃지 못할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하기도 했다.

배순탁은 "80년대 음악과 90년대 음악의 가장 다른 점은 사운드 품질이다"라며 "가요의 사운드가 팝 못지않다고 느끼게 해 준 일등공신이 바로 신해철, 윤상, 이승환 같은 이들이다"라고 했다.

넥스트로 승승장구하던 신해철은 돌연 1997년 12월 31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팀의 해산을 선언했다. 이에 신해철은 "음악을 하는 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계속해도 되겠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거니까 다음을 위해서는 우리를 부셔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각오가 없다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해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마지막 공연에서 끝내 눈물을 흘린 신해철과 팬들. 그 이후로 신해철은 영국 유학을 떠났고 6년 후 2003년 넥스트를 재결성했다.

신해철의 곡은 노랫말의 울림이 큰 것으로 유명했다. 이에 윤상은 "대부분의 가사를 직접 작사했다. 글 부분에서 누구보다 고민이 많았던 작곡가였을 것이다"라고 했다.

양동근은 그가 작사했던 '나에게 쓰는 편지'의 랩 가사에 대해 "당시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큰 울림을 줬다"라며 "킬링 벌스다"라고 극찬했다.

신해철의 가사는 여러 곳에서 회자됐다. 청소년 드라마 '공룡선생'에서는 그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조명하기도 했다. 이에 홍경민은 "그 곡을 듣고 처음 생각했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교실, 교실에 왜 하얗게 별이 뜨지? 어? 야간 자율학습 이야기하는 건가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크라잉넛은 이 곡에 대해 "우리 앞의 생이 끝날 때 너는 잘 살았냐 물어볼 수 있는 노래다. 음악을 표현하는 방식도 너무 좋다"라며 감탄했다.

그의 가사는 누군가에게는 발견이 되고 시작이 되기도 했다. 페퍼톤스 신재평과 이장원은 "넥스트의 가사는 진지하고 찐했다. 그냥 흘려듣는 음악이 아닌 경청해야 하는 음악이었다"라고 평가했고, 배순탁은 "그의 음악을 통해 가사를 곱씹고 삶에 반영도 해볼 수 있었다. 그런 접근이 처음이다"라고 했다.

또 다른 이는 그의 가사에 대해 "의식의 흐름대로 내가 가는 걸음의 방향에 대한 가사인데 곡을 들으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라고 했고, 익숙한 단어로 생각해볼거리를 주는 가사로 시적이지는 않다"라고 했다.

페퍼톤스는 "가사가 가진 진실성 하나로 약간 거친 면이 있지만 그게 더 기억에 남게 되는 가사들이다"라고 했다.

그의 가사에 담긴 이야기들은 우리가 아직 그의 노래를 기억하는 이유였다. 자신의 가사가 많은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 신해철은 "가사에서 거짓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에서 입상도 없고 글 쓰는 것도 싫어했다"라며 "내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썼을 뿐,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하고 쓰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신재평은 "잘 팔릴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를 쓰니까 음악을 들을 때 그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10대, 20대 30대를 거치면서 들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또한 윤상은 그의 곡 '민물 장어의 꿈'에 대해 "이 친구는 이런 이야기도 노래로 만들 능력이 있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다"라며 "꾸밈없고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너무 드러낸다 싶을 정도로 투명해서 친구의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다. 정말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친구가 아니었나 싶다"라고 분석했다.

가수 신해철은 어느 순간 논객 신해철로 기억되었다. 그는 동성동본을 옹호하는 노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만들어 그들을 적극 지지했다. 한 공연에서 신해철은 "도둑질을 했는데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죄지은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떳떳하니까 인정해달라는 것이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윤상은 "이건 대놓고 그들을 응원하려고 만든 곡이다. 화자가 되어 노래하는데 이것이 동성동본에 가로막혔던 연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가사와 내용도 음악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는 그런 작가였다"라고 친구를 기억했다.

그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회에 일어나는 각종 이슈, 논란에 노래로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마음껏 했다. 94년 성수대교 붕괴,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세계의 문'에서 풍자했고 'MONEY'에서는 비자금 파문을 비판했다.

이에 김세황은 "이런 것들을 록커들이 표현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형은 솔직 담백하고 멋있게 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가감 없는 발언은 일부의 시각에서는 외면하고 싶은 목소리가 되기도 했다.

이에 동료들은 "너희 딴따라가 뭘 알아 하고 폄하를 하는데 신해철은 멋지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라며 "가수인데 100분 토론에 나와서 자기 생각을 말해도 되는구나 싶었다. 연예인 중에 그런 분이 계시다는 건 엄청 대단하고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독설가, 시사 논객이라는 이미지에 갇혀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이에 배순탁은 "의견을 제시해야겠다 했을 때 용기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라며 "대한민국 사회에 그런 사람은 앞으로 안 나올 것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럴 것이다"라고 했다.

과거 신해철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너무 지나치고 균형이 안 맞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모든 의견이 중간에 모여있는 것은 싫다. 그래서 난 일부러 오른쪽으로 가고 누군가 왼쪽으로 가주길 원했다"라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이에 친구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윤상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저 친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자기 음악을 편안하게 보여주는 게 가능할까 하는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 없었고 그런 부분 때문에 해철 씨가 떠나기 몇 년 전까지는 거의 교류를 하지 못했다"라며 "그 갭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던 중에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저도 이 친구가 제 곁을 떠나고 몇 년 동안은 그 공백이 뭔지 못 느꼈는데 떠나고 2,3년이 지나고 나서 저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니까 내게 저렇게 가까웠던 친구가 있었었나 싶더라"라며 논객이기 이전에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신해철을 돌아보았다.

신해철의 사망 전날 그를 만났던 윤상. 이에 윤상은 "며칠 있으면 깨어나서 폐를 끼쳐서 미안했습니다 라고 변죽 좋게 이야기할 거라고 믿고 싶었다"라며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해야 될지 방송에서 처음 한다"라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떠나기 전날 느낌에 날 부르는 것 같았다. 원래는 안 가려고 했다. 왜냐면 며칠 있으면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일어날 텐데 그때 이야기하면 되지, 누워있는 친구를 보기 싫었다"라며 "그래도 날 부르는 것 같은 느낌에 잠깐 보고 나왔는데 바로 다음날 떠났다"라며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윤상은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에 함께했던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너였니? 싶었다. 그게 너였으면 내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날 불러줘서 '나 편하게 보내줘'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마지막에 한 번 손을 잡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에게는 시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논객, 누군가에게는 청춘을 함께했던 친구였던 신해철은 많은 팬들에게는 대마왕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진행했던 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 그는 스스로 자신을 마왕이라 칭하며 청취자들에게 묘한 소속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방송을 통해 30분짜리 노래를 틀고 퇴근을 하기도 하고, 다른 스케줄 때문에 펑크를 내고 음악만 트는가 하면, 방송 1시간 내내 음악은 틀지 않고 이야기만 하는 등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기행으로 보일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이에 당시 PD는 "방송이 될수록 팬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해프닝도 많았다"라며 "첫 경고를 먹었던 날, 혼나고 일기를 썼는데 언젠가 걸릴 줄 알았다. 언젠가 걸릴 줄 알았는데 오늘이었다 라고 일기를 썼더라"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는 "DJ 만큼이나 청취자들도 쿨했다. 마왕은 그럴 수 있어라며 다 받아줬다. 그 DJ에 그 청취자로 궁합이 잘 맞았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김세황은 "해철이 형에게 라디오는 개인적으로 힐링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라고 했다.

당시 '좀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라는 코너를 통해 청년들의 상담을 자처했던 신해철. 그는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어차피 앞으로 사는 날에 가시밭길을 계속 나타날 거다. 그러니까 그냥 뚫고 가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열정에 활활 타서 눈에 빛내고 살면 피곤해서 못 산다. 열정의 형태는 자신이 정의하는 것, 마음속에 잔잔한 불이 타고 있는 것 만으로 좋다"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또한 "남의 고민에 경중을 따지지 마라. 고민을 털어놓는 이에게는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따끔하게 말하기도 했다.

이에 페퍼톤스는 "건설적인 이야기인데 삐딱하게 이야기해서 재밌게 들었던 것 같다. 현실 조언을 제대로 해줬다"라고 했다.

'고스트 스테이션' PD는 "그 사람을 굉장히 이해하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조언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라며 그가 말만이 아닌 진심으로 한 명 한 명을 위한 조언을 했음을 강조했다.

신해철은 인디씬 등 사람들의 관심이 덜 미치는 음악계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준 사람이었다. 이에 크라잉넛은 "우리 노래를 듣고 좋다며 우리 방송 한번 와볼래 하면 그건 정말 어마 어마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라고 했다.

끝으로 신해철에 대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한 사람, 개구쟁이, 유일무이한 캐릭터, 풍운아 같지만 더없이 따뜻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신해철을 좋아하는 것은 음악도 음악이지만 인간 신해철에 매력을 느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은 오랜 기억에 남는 법이라며 그가 오랫동안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영상을 본 선미는 "이것 혹시 신해철 입덕 영상이냐"라며 "매력이 진짜 넘친다"라고 놀랐다. 이에 윤상은 "몰랐던 분들이 알아주면 좋다"라고 흐뭇해했다.

선미는 "제 또래들에게 신해철이라는 인물에 대한 뚜렷한 기억은 논객으로서의 기억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비디오를 통해 그건 진짜 요만한 부분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라고 했다.

그리고 윤상은 "이 비디오를 보니까 안타까운 마음보다 그래도 이 친구 200% 노력해서 살았구나 싶다. 어떤 노력을 해서 자기를 표현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가질 수 있었는지 그 부분에서는 세상 부러울 것 없었던 아티스트였던 것 같다"라고 총평했다.

마지막으로 윤상은 신해철의 인생 비디오에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신해철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모르긴 몰라도 이 방송을 엄청 좋아할 것 같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해주길 바랬을 것이다"라며 어디선가 기뻐하고 있을 친구를 떠올렸다.

※ ⓒ SBS & SBS Digital News Lab. : 무단복제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