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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감시견이 짖지 못하면[오늘과 내일/고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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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화폐 논란 등이 보여준 비판 거부 권력

시민 아닌 臣民을 원하는 사회가 되고 있나

동아일보

고기정 경제부장


제2의 테슬라로 불렸던 미국 수소전기차 업체 니콜라가 나락으로 떨어진 건 공매도 전문 투자업체의 67쪽짜리 보고서 때문이었다. 2023년부터 수소전기트럭을 양산하겠다는 니콜라가 실제로는 언덕에서 껍데기만 있는 차를 굴리는 영상을 만들어 수소트럭이라고 속였다는 내용이다. 니콜라는 “공매도 세력의 부당한 공격”이라고 했지만 창업자가 돌연 사임하면서 의혹은 사실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기류다. 니콜라 주가는 고점 대비 20%로 쪼그라들었다.

한국에서 공매도 세력에 대한 인식은 개미들 피눈물 나게 하는 주가조작꾼 수준이다. 코스피가 박스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도 주가가 오를 만하면 외국인과 기관의 공매도 공세로 주저앉기를 반복한 때문이다. 내년 3월까지 공매도가 금지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공(空)매도는 말 그대로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없는 것’을 파는 행위다. 특정 종목의 주가가 떨어질 것으로 보이면 해당 주식을 빌려서 판 뒤 실제로 값이 하락하면 그 가격에 주식을 사서 빌린 주식을 갚는 식으로 차익을 얻는다.

주가가 떨어지는데 좋아할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공매도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감시견 역할 때문이다. 투자자,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물론 정부도 주가 상승의 열망에 취한다. 이럴 때 공매 투자자들은 주가 하락에 베팅한다. 그러려면 해당 기업 주가가 거품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니콜라에서처럼 말이다. 미국 에너지산업의 상징이던 엔론, 중국판 스타벅스라던 루이싱커피가 몰락할 때도 공매 투자자가 회계 조작 사실을 먼저 제기했다. 한국에서 공매도가 문제인 건 개인들은 못 하는데 기관과 외국인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매도를 범죄시할 게 아니라 이런 불합리를 먼저 고쳐줘야 한다.

공매도적 순기능이 증시에서만 필요한 건 아니다. 얼마 전 대권주자라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역화폐의 한계를 지적한 조세재정연구원을 “얼빠진 국책연구기관” “청산해야 할 적폐”라며 “조사와 문책”을 주장했다. 사실 지역화폐의 문제점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다른 돈으로 쓸 소비를 지역화폐로 대체하면 소비 진작 효과는 제한적이다. 지역 내 소비가 늘어난다지만 다른 지역으로의 소비 유출이 차단돼 국가 전체 소비 총액이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 지역화폐 발행과 유통에 따른 비용만 더 들 뿐이다.

더욱이 경기도처럼 20만 원을 지역화폐로 충전할 때 5만 원을 공짜로 얹어주면 그 비용은 누가 대나. 이 지사는 지역화폐는 현 정부 국정과제이기도 하다며 전선을 슬그머니 확대했지만, 역으로 국책연구기관이 국정과제를 냉정히 평가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 사업에 금줄을 쳐놓고 성역으로 모셨던 과거로 돌아간다. 이런 것 지적하라고 전문가로 통칭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정부 주도 뉴딜펀드를 비판한 하나금융투자의 보고서가 삭제된 것도 마찬가지다. 뉴딜펀드로 수익이 날 사업 같으면 그 전에 민간에서 알아서 투자했다. 이 정도 말을 했는데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보고서가 삭제된 건 정상적이지 않다. 비판이 싫으면 민주주의나 시장경제 하지 말자고 하는 게 옳다.

역사학자 헤르만 파이너는 파시스트 국가의 철학을 “시민은 없고 신민(臣民)만 있다”고 요약했다. 지도자나 국가 권력에 대한 어떤 견제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교수나 연구자들이 실명 코멘트를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특정 권력층은 물론 권력 추종 집단의 비난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라는 반응이다. 견제와 비판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되고 있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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