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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기업인들 "전세계서 가장 강력한 ‘기업 처벌 국가’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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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종합세트’ 가상 시나리오 점검]

# A대기업은 '규제3법'이 통과된 이후 미국계 투기자본인 B펀드와 지분 다툼 상황을 맞았다. B펀드는 A사 지분 5%를 사들이고, 이를 무기로 감사위원 선임을 요구중이다. 감사위원 중 하나가 B펀드 이사로 선임되면 회사 기밀이나 핵심 정보를 손바닥처럼 볼 수 있다. A 대기업이 가진 지분은 40%가량. 특수관계인 등의 지분을 합치면 50%를 훌쩍 뛰어넘는다. 예전 같으면 B펀드의 요구는 부결시키면 그만. 하지만 A대기업 관계자는 속이 탄다. 50%를 넘는 지분 중 3%만 의결권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47%는 ‘사표(死標ㆍ죽은 표)다. ‘지분율 50% 대 5%’의 싸움의 결과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유다. 3%짜리 주주 여러 명이, 50%를 가진 한 곳보다 더 유리한 싸움이다. 올해 초 기준(1월 15일) 코스피 상장사의 외국인 지분율은 39%에 이른다. 누가 누구와 손을 잡을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 국내 한 제과기업은 국내에 집단소송제가 도입된 이후 과자 포장에 질소를 과다하게 넣어 내용물을 줄였다는 이유로 소비자들로부터 10억여원의 집단 소송을 당했다. 최고경영자(CEO)가 법정에 불려 다니느라 경영 혁신에 써야 할 상당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집단 소송이 보편화한 미국선 지난 2016년 얼음을 너무 많이 넣어 커피의 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소당한 일도 있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24온스(약 0.7L)인 벤티사이즈의 경우 얼음을 빼면 커피는 절반 정도인 0.4L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은 50억 원을 배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비싼 소송 비용만 치른 후 결국 원고 측 패소로 마무리됐다.

위 두 가지 경우는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기업규제 3법(공정거래법ㆍ상법ㆍ금융그룹감독법)과 집단소송제 및 징벌적 손해배상 등 소위 '규제 종합세트'가 원안대로 현실화할 경우를 가상해 상정해본 것이다. 재계에선 당연히 비명이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의 자문을 토대로 가상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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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당 대표실에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를 찾아 규제 완화 등을 오쳥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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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주 지분 50%나, 일반 주주 지분 3%의 가치는 같다?



① 3%룰 강화=상법 개정안에 담긴 ‘감사위원 분리선임’ 관련 내용이다. 감사위원은 회계 정보를 포함해 회사의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현재까지는 대주주 측이 제안한 이사 중 뽑히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3%룰은 감사 선임 시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을 합친 지분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한다. A대기업처럼 대주주가 지분 50%를 가져도 이 중 3%만 행사가 가능하단 의미다. 반면 일반 주주는 ‘3%룰’에서 조금 더 자유롭다.

2004년 소버린과 SK그룹 간 분쟁 당시 소버린은 보유 중이던 SK 주식 14.99% 중 12.03%를 4개의 자회사 펀드로 넘기면서 지분 쪼개기를 한 바 있다. 지난해 엘리엇도 현대자동차 지분 2.9%를 가지고 사외이사 선임과 배당 확대 등을 요구했지만, 현대차 측이 표 대결서 승리하며 이를 진압했다.

대기업 뿐 아니라 중견ㆍ중소기업들이 걱정이 더 큰 상황이다. 우호 지분을 모으기도 힘들고, 자금력도 달리기 때문이다. 정구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은 최근 "상장회사 중 대기업 비중은 9.5%지만, 중견ㆍ중소기업이 90.5%”라며 “상법개정안이 도입되면 재벌 대기업이 아닌 중소ㆍ중견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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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찾은 재계 단체장들. 23일 손경식(가운데)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과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 회장 등 재계단체장들이 김종인 국힘당 비대위원장과 면담을 위해 국회로 들어서고 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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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법안 간 모순된 부분도=공정거래법 개정안 중에는 일부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한 예로 개정안에선 지주회사가 의무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자ㆍ손자 회사 지분율을 상장사는 현행 20%에서 30%로, 비상장사는 40%에서 50%로 각각 높이도록 규정한다. 책임경영을 강화하잔 취지에서다.

하지만, 개정안은 상장ㆍ비상장 여부를 떠나 ‘총수 일가 지분 20% 이상인 기업(기존엔 30%)’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는 규제 대상으로 한다. 총수 일가 지분이 25%인 대기업이라면 기존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이 아니었지만, 앞으론 규제 대상이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정부 안에 따르면 지주회사는 자회사 지분을 늘려야 하는데,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 조항은 되레 자회사 지분을 낮추도록 유인하고 있어 혼란스럽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품의 효율적 생산과 안정적 수급을 위해 꼭 필요한 계열사 간 거래가 위축되면, 우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도 약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획소송 등 소송 남발 어떻게 막나



③ 소송 남발 우려=농심은 지난 2018년 미국에서 수년간 끌어온 라면 가격 담합 관련 집단소송에서 이겼다. 시작은 2012년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가격 담합을 이유로 135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일. 2015년 한국 대법원에서 과징금 부과가 부당하다는 결론이 났지만, 미국 내 집단소송은 이후로도 3년 넘게 이어지다가 결국 ‘농심 라면의 미국 수입자와 이를 수퍼마켓에서 산 간접 구매자가 제기한, 또는 이들을 위해 제기된 모든 청구를 기각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미 농심은 거액의 소송 비용을 치른 뒤였다.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집단소송법은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로 인해 50인 이상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면 소송 제기가 가능하다. 법무부는 “디젤차 배기가스 조작사건의 경우 미국과 독일에서는 배상이 이뤄졌지만, 우리나라에선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취지를 밝혔다.

집단소송에 대한 평은 갈린다. 지난 2007년 미국에서는 금융서비스 회사인 서티지 체크 서비스의 개인정보 관리 책임자가 브로커에게 돈을 받고 850만명의 고객 정보를 넘겨준 일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1인당 2만 달러(약 235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종종 발생하지만, 제대로 된 피해배상을 받는 경우는 사실상 드물다. 집단소송제를 도입을 주장하는 측의 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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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최근 국회를 방문 기업규제 3법의 완화를 요청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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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업들은 ▶소송 남발로 거액의 소송 비용을 치러야 하며 ▶CEO가 법정에 불려다니느라 경영을 제대로 못할 것을 우려한다. 실제 미국 월스트리트의 유명 로펌인 밀버그 와이스는 1970년부터 대기업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걸면서 원고를 매수해 온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다. 밀버그 와이스는 2억 달러(약 2350억원) 이상의 부당 이익을 거뒀을 것이라고 추정됐었다.

실제로 아직 집단소송제가 도입되기도 전인데, 각종 ‘피해자 카페’에는 원고를 모집한다는 변호사의 게시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경총은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신중한 검토 없는 집단소송제 도입으로 인해 거액의 배상을 노린 기획소송이 잦아질 우려가 있고, 기업은 상시적인 소송 리스크에 시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 “1심을 배심원이 결정하는 국민참여재판으로 규정하고 있어 ‘여론재판’의 우려도 크다”고 지적했다.

④ 피해액의 5배 내놓아라=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엔 ‘기업의 위법행위로 다중의 피해가 발생했을 때 실제 피해액의 최대 5배까지’ 손해배상을 하도록 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이미 제조물책임법 등에서 3~5배 한도의 배상책임제를 도입해 놓고 있다. 중복 규제란 반발이 나오는 이유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우린 법 위반 시 과징금뿐 아니라 형벌도 받는데, 여기에 형벌 성격의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되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처벌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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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의 기업 규제 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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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잘려도 노조로 입사 가능



⑤ 해고자나 실업자도 노조 가입 가능?=이게 전부가 아니다. 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서다. 개정안은 해고ㆍ실업자도 기업 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노조 전임자에게 사용자 측이 임금을 주지 못 하게 한 규정도 삭제됐다. 정부 입법안대로라면 노조는 협상과 투쟁에 능숙한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들여 전임자 역할을 맡길 수 있다. 여기에 노조가 강력한 회사의 경우 노조가 전임자 임금 지급을 회사 측에 요구해 성사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수기ㆍ이소아ㆍ강기헌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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