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6 (화)

임신 주수 고집하는 정부…‘여성의 기본권’ 논의는 빠졌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낙태죄 대체 입법 어디까지 왔나]

“14주 이내 허용…22주 이후 처벌”

법무부, 정부 초안 입법예고 예정

양성평등위 ‘폐지’ 권고와도 배치

여성계 ‘처벌 패러다임’ 전환 촉구

“태아·여성 이익 분리하는 건 오류

생명경시 풍조 만연도 허구적 상상”

주수 관계없는 임신중지 허용 촉구


한겨레

지난해 4월 서울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 의료계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형법상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대체입법 시한이 연말까지로 석달밖에 남지 않았지만, 입법 내용을 두고 정부와 여성계 간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논의 과정에서 임신 주수에 따라 임신중지 허용 여부를 각각 다르게 규정하는 방안도 검토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여성계는 “사문화된 처벌법을 부활시키고 여성의 인권을 퇴행시키는 일”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27일 정부 관계자와 여성계 등의 말을 종합하면, 정부는 10월 중으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을 목표로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5개 부처가 입법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핵심 쟁점은 임신 주수에 따른 임신중지 허용 여부다. 법무부가 낸 형법 개정안 초안은 임신 기간에 따라 임신중지 허용 사유를 차별적으로 두고 있으나, 여성계는 임신 주수와 관계없이 처벌조항을 완전히 삭제할 것을 요구한다.

법무부의 형법 개정안 초안을 보면, 임신 14주 이내에는 임부의 요청에 따라 임신중지가 가능하지만 14주와 22주 사이에는 임부의 건강이 위험하거나 사회·경제적 사유 등 일정한 사유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이때 ‘사회·경제적 사유’는 △학업·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때 △소득이 충분하지 않거나 불안정할 때 △미성년자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등을 의미한다. 임신 22주 이후에 시행하는 임신중지에 대해선 현행 처벌 조항을 그대로 적용한다. 아울러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경우에도 전문가 상담과 숙려기간을 도입하는 방안을 함께 검토 중이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법무부가 14주와 22주를 기준으로 삼은 것은, 지난해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의견을 내면서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을 ‘임신 22주 내외’로 보고 그전까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단순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임신 제1삼분기’(대략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14주 무렵까지)에는 어떠한 사유를 요구함이 없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법무부는 “헌재 결정 취지를 충분히 반영해 곧 정부안을 입법 예고할 예정”이라며 실무 작업을 마무리하는 대로 관련 법률 개정에 본격 나설 계획이다.

이런 내용의 초안은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양평위)의 권고안에 배치된다. 앞서 지난달 법무부 양평위는 법무부에 “임신 주수에 따라 임신중지 허용 여부를 달리해선 안 된다”며 전면 폐지를 권고했다. 사람마다 신체적 조건과 상황이 다르고, 정확한 임신 주수를 인지하거나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란 이유다.

여성계도 처벌의 관점이 아닌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 대체입법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형법이 제정된 뒤 66년 동안 낙태죄 처벌 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됐는데도 이를 유지함으로써 여성의 현실을 더욱 후퇴시킬 뿐 아니라, 임신·출산·양육 전 과정에서 여성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는 점 때문이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2017년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에 답변하면서 “(현행 법제는)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 여성의 건강권’ 침해 가능성 역시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홍연지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장은 “헌재가 22주를 기준으로 내세운 건 여성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실제로 후기에 임신을 중지하는 극소수 여성들의 경우 사회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많았다”며 “헌재가 지난해 ‘태아의 이익과 여성의 이익이 방향을 함께한다’고 강조했는데 ‘체외 생존 가능성’이란 가설만 가지고 태아와 여성의 이익을 분리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다. 생존 가능성도 여성의 돌봄과 최첨단 의료기술의 투여가 뒷받침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홍 팀장은 “모든 기간의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캐나다의 경우 임신 20주를 넘는 임신중지는 전체의 0.75%에 불과하다. 전면 허용으로 소위 ‘생명경시풍조’가 만연해질 것이란 건 허구적 상상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례”라고도 덧붙였다.

여성계는 28일 여성계 원로 100인의 공동선언을 시작으로 기자회견 등 공동행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100인 선언’에 참여한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는 노동, 학습, 성관계, 경제생활, 가족관계 등 모든 측면에서 여성 시민이 행사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며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면, 여성 시민들의 삶과 인권이 전방위적으로 제한되므로 여성에게도 국가에도 막심한 손해를 끼칠 것”이라고 밝혔다.

박다해 김정필 기자 doall@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채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