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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작업복엔 ‘하청표기’, 대학점퍼엔 ‘입학전형’···계급장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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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청·하청, 정규·비정규 티나는 작업복
출신고교·입학전형까지 드러낸 과잠
일상화된 차별에 "문제의식 안 느껴"


[파이낸셜뉴스] #. 국내 굴지의 조선소에서 액화천연가스(LNG)선 관련 업무를 하는 이모씨(36)는 점심이면 구내식당 대신 외부에서 식사를 한다. 구내식당은 원청과 하청직원들이 함께 이용하는데 하청직원들은 작업복 명찰에 소속이 표기돼 하청인 게 티가 나기 때문이다. 1년 이상 근무했지만 이씨는 조선소 사람들이 다른 부서 직원을 만나면 명찰부터 흘긋흘긋 확인하는 게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고 털어놨다.

#. 서울에서 단체복 주문판매업을 하는 김모씨(40대)는 올해 신경쓰이는 주문 한 통을 받았다. 한 대학 신입생들이 과잠(대학교 학과점퍼)을 주문하며 통상 대학교 이름이 들어가는 자리에 과를, 과가 표기되는 자리에 출신 고등학교를 표기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맞춤옷이라 정해진 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과와 출신고를 강조하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그는 전했다.

노동현장에서 착용하는 작업복과 대학교에서 흔히 보이는 과잠이 차별의 징표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작업복은 같은 일터에서 노동자의 소속을 드러내는 방식, 대학교는 학생들의 전형이나 출신고교를 표기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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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굴지의 조선소 다수에서 작업복 명찰에 하청업체 소속을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은 대우조선해양 직원들이 퇴근하는 모습. 사진=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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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로 본청·하청 표기···일부 디자인도 달라
29일 업계 및 대학가 등에 따르면 노동현장에서 작업복으로 본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 대형 조선소에선 정규직 직원은 명찰에 소속부서만 쓰여 있지만 하청업체는 업체 이름을 그대로 적도록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일부 조선소는 소속에 따라 작업복과 명찰을 다른 디자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소속과 신분에 따라 복장 등을 나누는 행태는 제조업에서 널리 퍼져 있다. 수도권 금형제조공장을 주로 방문하는 중견기업 영업사원 윤모씨(30대)는 한 공장 정규직 직원이 하청업체 직원에게 작업복 명찰을 제대로 달라고 지적하는 모습을 봤다고 전했다.

윤씨는 “정규직만 명찰에 소속이 표기되고 파견은 명찰이 없다거나 있어도 형태가 다른 곳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본사 직원) 한 명이 식사하러 나갈 때 파견직원한테 명찰을 왜 뗐냐고 지적하더라”며 “젊은 직원이 이런 구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 말했다.

자동차·경호·외식·건설·주차 관련 업체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는 원청과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작업복과 명찰 등을 다르게 배정받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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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잠에 출신 고등학교를 표기한 대학생들을 다룬 한 다큐 장면. 출처=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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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감에서 위화감으로··· 출신고·전형까지 새겨
대학생 사이에서도 서로를 구분하는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애교심과 소속감의 상징이었던 대학교 과잠에서조차 구분과 차별의 징표가 발견된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과잠에 학과와 출신 고등학교, 심지어는 입학 전형까지 새긴 사례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Y대학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과잠이 원래는 과나 동아리에서 단체 주문해서 입는 건데 유명한 고등학교를 나온 애들끼리 마크나 문구를 통일해서 추가하기도 한다”며 “팔목이나 등에 (고등)학교 이름을 적는 걸 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이 학생은 “작년에 친구가 수능시험으로 들어왔다는 표시를 과잠에 적은 걸 보고 물어봤는데 그냥 멋이라며 '이상하게 느끼는 게 더 이상하다'고 말하더라”면서 “다른 전형으로 온 입장에서 위화감이 드는 게 이상한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코로나19로 캠퍼스를 가지 않는 경우가 많음에도 올 상반기 과잠 제작이 꾸준히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과잠을 제작하는 업체 중 적지 않은 수가 '출신고교와 입학전형을 적어달라는 주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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