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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큰 뜻은 비난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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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로 보는 사람경영-38] 제환공에 이어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로 등극한 진문공 중이의 삶은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기에 딱 좋은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 진헌공이 후계자를 무리하게 바꾸는 변란에 휩싸여 갑작스럽게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그를 정적으로 여긴 진혜공이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고 했을 때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습니다. 고달픈 망명길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한 나라의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문전박대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제나라와 초나라, 진(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군위에 올랐지만 그때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지요.

그러나 약 10년 동안 진(晉)나라를 통치하며 춘추시대 최대 강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가 만든 진나라는 중국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핵심은 어떤 시련과 고난에도 굽히지 않았던 큰 뜻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외삼촌이자 스승이고 가장 신뢰했던 신하인 호언의 가르침에서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습니다.

중이 일행은 진혜공이 보낸 자객의 칼날을 피해 오랜 기간 망명생활을 했던 적나라를 떠납니다. 안전한 곳을 찾아 길을 나선 겁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제나라였습니다. 제환공과 관중이 그들을 받아들일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죠. 문제는 동쪽에 있는 제나라에 도착하려면 여러 제후국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안전하게 제2의 망명지인 제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중이와 혈연인 위나라 군주가 그들의 방문이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했습니다. 급하게 떠나느라 제대로 여비를 챙기지 못해 출발 때부터 빈털터리였던 중이 일행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길을 재촉해야 했습니다. 너무 배고파 민가를 약탈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중이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굶을지언정 도둑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죠.

그들은 '오록'이라는 마을에서 기진맥진했습니다. 바로 그때 농부들이 밭두렁에서 식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이는 너무 배고파 호언을 시켜 밥을 구걸하게 했습니다. 호언은 농부들에게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나라에 왔소. 저 수레 위에 있는 분이 진나라 왕자로 우리 주인이오. 먼 길을 오느라 식량이 떨어졌으니 밥 한 끼만 먹여주시오." 농부들은 멀쩡하게 생긴 양반들이 밥을 구걸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호언의 말에 삐딱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내대장부들이 자급할 생각은 않고 밥을 구걸한단 말이오. 우리는 시골 농부라 밥을 배불리 먹어야 쟁기질을 할 수 있소. 어찌 다른 사람에게 밥을 줄 수 있겠소?" 그러자 호언이 다시 애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인을 위해 한 그릇만 주시오." 이런 간청에도 농부들은 중이 일행을 비웃으며 흙덩이를 건네주며 조롱했습니다. "이 흙으로 밥그릇이나 만드시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중이와 신하들은 화가 났습니다. 힘이 세고 성질이 급한 위주가 농부들의 밥그릇을 박살냈고 중이도 채찍을 들어 그들을 때리려고 했습니다. 이때 호언이 중이를 말리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밥을 얻기는 쉬워도 흙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땅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하늘이 촌사람의 손을 빌려 토지를 당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를 얻을 조짐인데 어찌 화를 내십니까? 주군께서는 수레에서 내려 절을 올린 후 받으십시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중이는 전율을 느낍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강하게 깨닫는 순간이었죠.

영어에 '에피파니(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신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을 의미하는데 진실을 알게 되는 갑작스러운 경험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호언의 말은 중이에게 '에피파니'를 경험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언의 권유에 따라 중이는 절을 하고 농부들이 장난으로 준 흙을 받습니다. 이런 행위를 보며 농부들은 또 비웃었지만 중이 측근들은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순간 그들은 아마도 조롱과 비난, 곤궁과 시련에도 반드시 진나라로 돌아가 국정을 바로잡고 최고 국가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중이와 그를 따르는 동지들의 결심과 의지는 더 굳건해졌습니다. 큰 뜻이 더욱 공고해지는 계기가 됐던 것입니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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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1970년대 초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한국 중공업의 초석을 놓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떠오르게 합니다. 조선소 설립 자금을 구하려고 영국으로 날아간 정 회장은 놀림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조선소 용지와 설계도 하나만 달랑 들고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차관을 요구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죠. 그러나 한국에 조선소를 짓겠다는 그의 큰 뜻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박업계에 영향력이 큰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 설득합니다. 바로 이때 정 회장이 꺼낸 것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였습니다. 한국이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며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 회장의 열정에 롱바텀 회장은 마음이 움직였고 그의 도움을 받아 차관을 얻고 선박 수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 최고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의 탄생은 비난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정 회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장박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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