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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안 쓸 이유가 없다’의 함정” 안 쓸 이유가 없는 것이, 쓸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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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쓸 이유가 없다”

이말은 스타트업, 벤처 생태계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표현 중 하나다. 같은 벤처업계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보통은 스타트업, 벤처캐피털, 컨설팅펌 등 각 기관들의 업무에 따라 자주 쓰이는 표현이나 전문용어들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이 “안 쓸 이유가 없다”라는 마법의 표현은 다양한 기관들과 그 구성원들이 즐겨 쓰는 것 같다.

“안 쓸 이유가 없다”는, 아래와 같은 이유들이 설명된 뒤에 표현된다.

  • – 이 서비스는 경쟁 서비스에 비해 기능이 탁월하기 때문에,
  • – 이 서비스는 충분한 기능을 제공하면서도 경쟁 서비스에 비해 다소 가격이 낮으므로,
  • – 이 서비스는 고객층이 쓰고 있는 다양한 타 서비스들을 하나로 통합해주므로,
  • – 이 제품은 어떤 불편함을 해소해주는데 경쟁제품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 – 이 서비스가 진입하려는 영역에는 아직 혁신이 없었으므로 등
“안 쓸 이유가 없다”는, 아래와 같은 상황에서 쓰이곤 한다.

  • – 스타트업이 투자자 대상으로 자사 서비스를 설명하는 피칭이나 티타임을 하면서,
  • – 벤처캐피털 투자심사역들이 새로 검토 중인 스타트업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 – 스타트업을 자문하는 컨설턴트들이 새로 론칭된 스타트업 서비스 보도자료를 보면서,
  • – 스타트업 대표자들의 네트워킹 모임에서 서로의 서비스를 응원하고 칭찬하면서 등
그런데, 그 훌륭한 서비스들을 고객들이 진짜로 쓰게 될까? 안타깝게도 “아니오”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우리는 체감적으로 알고 있다. 왜 그럴까? 왜 고객들은 답답하고 비이성적 이게도 ‘안 쓸 이유가 없는’ 우리 서비스를 외면하는 걸까?

왜냐하면, “안 쓸 이유가 없다”와 “쓸 이유가 된다”는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프로덕트의 기능적 분석보다는, 행동경제학과 심리학 원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1. 스타트업들이 야심하게 출시하는 서비스는 대부분


경쟁 서비스가 존재하거나, 뚜렷한 경쟁 서비스가 없더라도 대체제가 이미 존재하기 마련이다.

‘Zoom보다 안정적이면서 더 저렴한 화상회의 툴’의 타깃 고객은 Zoom와 Teams로 회의를 하고 있고, ‘유저 성향에 맞는 영상 추천 서비스’의 타깃 고객은 YouTube와 Netflix로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고, ‘가격도 더 저렴한 세무기장 반자동화 SaaS’의 타깃 고객은 근처 세무기장 사무소 대행 서비스를, ‘가족 구성원별 영양 상태에 맞는 반찬 큐레이션 정기배송’의 타깃 고객은 동네 단골 반찬가게를 쓰고 있다.

즉, 당신이 상상하는 페르소나 고객은 다른 서비스들을 쓰면서,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글로벌 기업의 소프트웨어든, 전통적으로 인력이 해결하는 방식이든.

2. 그런데 우리 인간(고객)의 뇌는 이미 결정한 무엇인가를 번복하거나 바꾸는 것을 것에 적합하지 않은 특성과 환경에 놓여있고, 조직 내에서의 책임소재 등 다양한 사회적 장애물도 존재한다.

1) 후회 회피 편향(regret aversion)

  • – 이미 익숙하게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결정을 내려서 후회할 일을 만드는 것을 뇌는 싫어한다.
  • – 또한 과거 결정 사항을 바꾸는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은, 과거 자신의 판단이 틀렸거나 적어도 지금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새로운 정보처리 스트레스

  • – 인간은 하루에도 크고 작은 정보들을 처리해서 수만 개의 의사결정을 한다. 우리가 인식조차 못하는 작은 것들(화장실 슬리퍼를 왼발부터 신을까?)부터, 인식은 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들(줄무늬 양말을 신을까?), 일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들(B사의 투자제안서의 7-1항은 우리에게 불리한가?)까지.
  • – 그래서 우리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하거나 가급적 미루려는 성향이 있다. 스타트업의 서비스는 고객에게 어느 정도로 에너지를 쏟아서 정보를 취합하고 신중히 검토할 중요 의사결정일까?
3) 보유효과(endowment effect)

  • –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을 때보다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내놓는 것을 손실로 여기는 심리현상 (진화학적으로는, 이미 가진 것을 사기당해서 빼앗기는 것보단 그냥 가지고 있는 게 낫다는 심리적 기재의 반영이라고 해석함)
  • – 홈쇼핑에서 무료반품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이유. 이미 내 것 혹은 우리 회사가 사용하는 서비스가 되면, 다소 불편하거나 비판하면서도 처분하거나 교환하지 않게 된다.
4) 손실회피(loss aversion)

  • – 의사결정 시, 이익을 얻는 것보다 손해를 보지 않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결정하는 성향
  • – 무언가를 잃을 때 느끼는 감정의 정도가, 무언가를 새로 얻을 때 느끼는 감정의 정도보다 훨씬 큼
  • – 즉, 새로운 선택을 했을 때 발생할지 모를 손해(사실은 지출이 더 커지는 것 아닐까? 원래 쓰던 서비스보다 더 비효율적이면 어쩌지?)에 대해 상상하고 거부감을 가지게 됨.
5)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

  • – 바꾸려고 하는 행동이 현재보다 특별하게 이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향.
  • – 위 여러 심리적 원리들이 반영되어, 인간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낀다.
  • – 우리 자신을 포함해 매우 쉽게 관찰 가능한 현상.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귀찮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홈트레이닝 App을 켜지 않고, 매일 짜증을 내면서도 핸드폰 액정을 수리하지 않고, 혁신적인 스타트업 서비스 런칭 기사를 보더라도 굳이 사내 도입을 검토하지 않는다)
6) 사회/조직에서의 책임

  • – 1)~5)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성향이라면, 그 사람들이 모인 회사나 조직 등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
  • – 여기에 더해 B2B 서비스를 새로 도입하려면 현재 쓰는 서비스의 단점이나 비효율을 인정해야 하고, 상세한 리서치를 통한 비교분석도 필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의 결정자에게 암묵적 or 명시적 책임을 묻는 일이 발생한다.
  • – 가령, 어마어마하게 불편하고 성능이 떨어지는 자체 구축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쓰고 있는 회사일지라도, 그 ERP 구축을 주도한 사람이 현직 임원으로 있다면, 그 대안이 Oracle이든 Slack이든 Flow든 도입 결정을 만들기 쉽지가 않을 것이다.
  • – 또한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인사, 재무 등의 SaaS 도입은 현직 직원 누군가의 역할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는 결정이라서, 고용문제도 연관되어 있다.
3. 따라서, “안 쓸 이유가 없는” 우수한 서비스/제품을 만들어낼 지라도, 그 존재 자체가 “쓸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창업자, 투자자, 컨설턴트들이 “안 쓸 이유가 없는” 서비스들에 다소 급하고 과한 확신을 가지는 것 같다.

4.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는’ 고객들을 우리 고객으로 데려와야 하는 미션을 가지고 출발하기 때문에,

  • 1) 실제로 탁월하고 우수한 서비스/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 2) 위의 심리적 장벽들을 낮출 수 있는 마케팅/영업도 매우 중요하다.
5. 그렇다면 [탁월한 제품을 만든다 + 고객 심리 분석을 통한 마케팅/영업을 한다]는 매우 당연하고 쉬워 보이는 이 원리가 왜 잘 작동하지 않을까?

  • – 재미있게도 위에서 언급한 1)~5)까지의 행동 경제 및 심리적 현상이, 스타트업 CEO나 투자자 등에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 – 우리 (스타트업, 투자 포트폴리오, 잠재적 투자대상, 고객사)의 서비스는 이미 열심히 개발했고, 이미 나와 일심동체 같고, 개선하려면 많은 정보를 다시 수집해야 하고, 혹시 pivot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많은 의사결정 실책을 인정해야 하고, 혹시나 새로 개선했다가 고객 이탈 등 손실이 발생할까 많이 두렵고, 마이너 한 개선을 하며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따라서 생각보다 실제로는 탁월한 제품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 – 또한 마케팅/영업에서도, 여전히 ‘우리 서비스/제품이 이렇게나 좋은데’라고 설명하는 성격의 콘텐츠를 바탕으로 “안 쓸 이유가 없어요”라는 이야기만 신규 고객에게 광고를 노출하고, 그로스 해킹 강의에서 본 push 메시지를 시도한다면 효율이 나오기 어렵다. 물론, 마케팅/영업 원리들은 기본적으로 고객의 심리현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방식과 이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핵심 메시지를 무엇으로 도출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이냐가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6. 객관적 시각과 디테일에 대한 고민과 질문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1) 객관적 시각으로 우리 서비스를 분석하기

  • – 우리 서비스가 사업소개서에 나와있는 SWOT 분석, 경쟁사 비교표에 나와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리 탁월한가? CEO 자신이나 우리 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최선을 다했으니까 최선의 제품이 나왔을 것이라 정신승리하고, 그걸 고객에게 강요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건 아닐까?
2) 더 탁월한 서비스/제품 만들기

  • – 고객이 그 많은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서 우리를 선택하게 하려면 얼마나 더 명확하게 뛰어나야 할까? 탁월함이란 뭘까? 객관적이나 절대적으로 우수한 서비스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와 경쟁사의 장단점을 디테일하게 이해하고 개선에 반영하고 있을까? 실제로 매우 탁월한 제품이라면, 이걸 타깃 고객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
3) 고객을 더 디테일하게 이해하기

  • – 우리가 생각했던 타깃 고객의 페인 포인트를, 고객은 진짜 불편해할까? 경쟁사라고 생각했던 기업이 아니라, 아예 다른 방식을 통해서 고객이 불편을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꾸준히 내보내는 멋있는 브랜드 이미지와 여러 광고 메시지는, 고객이 새로운 선택을 결심할 만큼 잘 설계되어 있을까?
  • – 혹시 우리 회사는, 소개팅에 나와서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한 시간째 자기 자랑만 늘어놓던 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안 쓸 이유가 없다”는, “쓸 이유가 있다”나 “쓸 이유가 된다”와는 매우 다르다.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꼭 학술적 분석이 아니더라도 경험적으로 이 차이를 잘 아는 기업들은, 높은 확률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 같다.

글: 박병은(bepark@find-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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