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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언택트 추석... "가족문화 구심점, 명절 퇴색 막아라" 숙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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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29일 오후 광주 북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녀와 가족을 온라인 화상 화면으로 만나고 있다. 광주 북구청과 북구청직장어린이집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고향 방문 자제 요청으로 명절에도 가족들을 만나기 어려운 주민들과 원생들을 돕기 위해 화상 통화 시스템 설치 등을 지원했다. 광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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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사는 김모(86)씨는 추석을 앞두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 속에 서울 등지에 거주하는 자녀들에게 '귀성 금지'를 통보한 터라, 음식을 준비할 일손도 음식을 먹을 입도 줄었지만, 차례상 준비 때문이다. 자녀들이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을 모두 만들어 배송해주는 ‘완제품 차례상’을 주문하겠다고 했지만 김씨는 손사래를 쳤다. 조상의 덕을 되새기고 공경하는 의미가 담긴 차례상에 간편식 등 시판제품을 올리는 게 아직은 낯설다. 김씨는 “이번 추석엔 자식들도 귀향하지 않아 차례도 안 지낼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어 최소한으로 간소하게 차리려 한다"며 "가족과 이웃의 따뜻한 정을 확인하는 의미 깊은 의례가 신종 코로나 벽에 막혀 퇴색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명절은 만나야 ‘제 맛’


명절이 반복될 때마다 격식보다 실속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이 같은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경기 불황과 양성평등 확산 속에 ‘간소화’로 압축되는 ‘언택트 추석’이 사람들로부터 환영 받는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다. 그러나 내년 설도 ‘언택트 명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코로나19로 인한 현재의 분위기 고착화, 그로 인해 전통 명절의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29일 김도일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장은 “추석의 핵심 가치는 결실의 계절을 맞아 나를 있게 한 조상에 감사드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자매와 정을 나누는 것”이라며 “요즘 시대에 그 일이 비대면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나누고 공유하는 느낌은 오프라인에서 모였을 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고향 방문과 이동 자제를 요구 받는 올해 추석 명절의 의미 퇴색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시가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추석 연휴 계획을 물은 설문에서 10명 중 7명(68%)이 ‘고향 , 가족, 친지 방문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경기도가 실시한 설문에선 10명 중 8명(79%)이 고향 방문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수도권에는 인구 절반이 몰려 있다.

축소ㆍ취소된 차례, 고착화 하나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지역 곳곳에는 추석 때 차례상 규모를 대폭 축소하거나 지내지 않겠다고 ‘커밍아웃’하는 가정들이 널려 있다. 충북 청주의 한덕중(52)씨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모여서 음식 나눠먹지 말라’는 점을 지키려면 차례를 안 지내는 수밖에 없다”며 “주변에 이렇게 결정한 집들이 손에 꼽기 힘들 만큼 많다”고 말했다. 대신 한씨는 집안 별로 각기 산소를 찾아 성묘만 할 계획이다. 그는 “명절만 되면 차례상을 놓고 벌어지는 미묘한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올 추석에는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분위기의 고착화다. 한번 줄어든 차례상의 규모는 웬만해선 복원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현풍 곽씨 종손, 곽태환씨는 “최근에 명절 때 놀러 가는 사람도 많고, 차례에 참석을 잘 안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며 “올해는 우리도 줄여서 차례를 지내지만,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원래대로 복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경북지역의 한 종가 종손은 “지금도 이미 계속 차례상 규모가 줄고, 제사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며 “줄인 것을 다시 키우는 것이 불가능한 점을 감안하면 내년 설에도 이번 분위기가 이어질까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지킬 건 지켜야…”그 필요성 차고 넘쳐”


코로나19가 강요한 ‘언택트 명절’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숙제를 던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는 “친인척을 한 자리에 모으고 그 자리에서 가정교육도 이뤄지는 등 차례, 제사 같은 전통 명절 의례는 건전한 가족 문화의 구심점이었다”며 “전통적인 명절의 의미가 빠르게 퇴색 내지는 변화하는 게 기정 사실인 만큼 건전한 가족 문화를 형성할 대안을 발굴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여행이 강력한 ‘방안’이 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규모 가족 중심의 행사인 만큼 차례나 제사가 열리는 명절을 완전히 대체하긴 힘들 것으로 봤다. 허권수 전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장은 “차례와 명절의 순기능과 필요성은 차고 넘친다”며 “우리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실의 배경을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민승 기자 msj@hankookilbo.com
대구= 전준호 기자 jhjun@hankookilbo.com
광주=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청주=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
창원= 이동렬 기자 dylee@hankookilbo.com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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