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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효도 각서' 소용없다…부모 "땅 도로 내놔" 소송냈다 패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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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시대 엷어지는 효③ 부양 갈등이 법적 다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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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감 자료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제기한 부양비 소송은 지난 5년간 1225건 발생했다. 연도별로 보면 2015년 262건, 2016년 270건, 2017년 239건, 2018년 252건, 2019년 202건 등 매년 200~300건씩 꾸준히 소송이 발생하고 있다.. [중앙포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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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에 사는 A씨는 “부모의 건강과 영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효도 각서’를 믿고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했다.

자녀는 “아버지가 생활하는 데 어려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3층 건물을 넘겨받은 뒤 태도를 바꿨다. A씨는 결국 지난 2016년 “건물을 다시 돌려달라”며 자녀에게 소송을 냈다.

4년에 걸친 재판 끝에 서울동부지방법원은 지난 4월 “효도 각서에는 자녀가 효도의 이행을 조건으로 일정한 의무를 부담한다거나 그러한 의무를 부담하는 것을 ‘조건으로 증여’ 받는다는 내용이 없다”며 자녀의 손을 들어줬다. A씨는 항소했지만 기각했고 결국 재산을 돌려받지 못했다.

#경기 부천시에서 혼자 사는 B씨(97)는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은 아들에게 소유권 이전 등기 말소 청구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지난 1월 이를 기각했다. 거동이 불편한 B씨가 부천에서 춘천지법까지 오가며 아들과 법정 싸움을 한 이유는 자신이 죽은 뒤 묻힐 땅을 되찾기 위해서다. B씨는 32년 전 셋째아들(55)에게 땅을 물려줬다. B씨의 아내와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었다. 땅을 증여하며 B씨는 “절대 땅을 팔지 말고 나를 잘 부양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했다.

아들은 증여받자마자 생활비를 조금 지원했을 뿐,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B씨는 주장한다. 아들은 땅을 팔지 않겠다는 약속도 어기고 1300만원을 받고 땅을 팔아버렸다. B씨는 “아들이 실거래가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동업자에게 땅을 팔았는데, 땅을 다시 돌려주지 않기 위해 위장 매매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들은 이후 동업자와 함께 이 땅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다고 알려졌다. 결국 B씨는 지난 2018년 아들이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부양 의무 등을 조건으로 아들에게 땅을 증여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각서나 기록이 없다”며 아들 손을 들어줬다. B씨가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기각했다. 당시 법정 안에서 B씨 부자는 약 2m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지만,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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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제기한 부양비 소송.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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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자녀에게 청구한 부양비 구상권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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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문화가 점점 엷어지면서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녀가 늘게 마련이다. 부모가 이런 자녀를 그냥 두고보던 시대가 지났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자녀를 법정으로 끌고 간다.

29일 사법연감 자료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제기한 부양비 소송은 지난 5년간 1225건 발생했다. 2015년 262건, 2016년 270건, 2017년 239건, 2018년 252건, 2019년 202건으로 매년 200~300건씩 꾸준히 소송이 발생한 셈이다. 2002년 98건에서 크게 늘었다.

국가가 자녀를 대신해 극빈 노인을 부양하고 부양비를 자녀에게 내라고 구상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양능력이 있는 자녀가 이런저런 사유를 들어 부모를 부양하지 않을 경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보호한 뒤 구상권을 행사한다. 지난 5년간 1154건 이어졌다. 보건복지부의 국민기초생활 보장사업 구상권 청구 현황에 따르면 국가가 자녀에게 부양비 구상권을 청구한 경우는 2015년 193건, 2016년 261건, 2017년 247건, 2018년 231건, 2019년 222건이었다. 환수율은 2015년 59.3%, 2016년 55.7%, 2017년 62.0%, 2018년 51.5%, 2019년 46.3%로 절반 수준에 그쳤다.

국회에는 부모에게 재산을 미리 받은 후 부양의무를 지지 않는 ‘불효자 먹튀’를 막기 위한 법이 발의된 상태다.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17일 부양의무를 지키지 않은 증여자에게 증여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은 민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현행 민법 제556조에 따르면, 증여받은 사람이 증여자에게 일정한 망은 행위를 한 경우 증여를 해제할 수 있지만, 증여를 해제하더라도 같은 법 제558조에 따라 이미 이행을 완료한 부분에 대해서는 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 박 의원은 “수증자(자녀)가 증여자(부모)를 배신하고 망은 행위를 한 경우까지 수증자를 보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불효자 방지법에 대한 논의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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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감 자료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제기한 부양비 소송은 지난 5년간 1225건 발생했다. 연도별로 보면 2015년 262건, 2016년 270건, 2017년 239건, 2018년 252건, 2019년 202건 등 매년 200~300건씩 꾸준히 소송이 발생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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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안은 재산 증여가 이미 이뤄진 경우에도 증여자가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증여자 등에 대한 범죄행위로 증여가 해제되는 경우 수증자가 증여받은 것을 원상회복하도록 의무를 부여하고, 원상회복 관련 부당이득도 반환하도록 했다.

이런 법안이 처음이 아니다. 민병두 전 국회의원은 지난 19대 국회에서 이번 개정안과 비슷한 일명 ‘불효자 방지법’을 발의했다. 당시 ‘평생 모실 테니 집을 사서 같이 살자’는 둘째 딸 말을 믿고 6000만원을 준 뒤 버림받은 김씨(89)의 사연이 알려져 사회적 반향이 일었다. 김씨는 이후 딸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증여한 것으로 인정돼 패소했다. 당시 법안은 진도를 내지 못해 폐기됐다.

박완주 의원은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는 이미 이행한 (증여) 부분이라도 반환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퇴색돼 가는 효의 개념을 되살리고 가족공동체 복원에 기여할 수 있도록 법안 통과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독일 민법 제530조는 “증여자에게 중대한 배은행위를 저질러 비난을 받을 경우 증여를 철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프랑스 민법 제953조는 “수증자가 학대·모욕 범죄를 저지르거나 부양을 거절하는 경우 증여 철회가 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가 빠르게 발달해 과거 가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특히 부모 부양 인식이 가장 빠르게 변하는데 부양 의무를 가족보다는 사회에 두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처럼 불효자 방지법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정서적인 합의가 필요한 상황이다”고 덧붙였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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