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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이슈 일본 신임 총리 기시다 후미오

'무파벌' 스가 총리 만든 자민당 파벌 정치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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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정권의 첫 인사 '파벌 정치' 한계 드러내
소선거구제 후 '파벌→ 당 집행부' 권력 이동
'아베 1강' 구축으로 파벌 간 노선 경쟁 쇠퇴
총재 배출보다 주류 손잡고 논공행상 기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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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 자민당 총재가16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총리 선거에서 선출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의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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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파벌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가 자민당 총재로 선출돼 제99대 일본 총리에 오르는 데 파벌 정치가 작동한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주요 파벌들이 각자 자신만의 총재 후보를 내세워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모습이 사라졌고 당내 기반이 취약한 무파벌 후보 아래 일렬로 헤쳐 모인 것은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그러나 파벌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총리 취임 후 단행한 새로 임명된 당 집행부와 개각은 5개 지지 파벌에 대한 보은을 포함해 철저한 파벌 안배로 나타났다. 첫 무파벌ㆍ비세습 의원 출신 총리에게 기대한 세대 교체나 파벌 타파 등의 변화의 기미는 찾을 수 없었다. 총리만 최대 파벌 소속인 아베 신조(安倍晋三)에서 파벌이 없는 스가로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 사전 담합과 밀실 거래 등의 파벌 역학을 답습한 선출 과정이 갖는 한계 탓이었다.

자민당 파벌의 연원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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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 일본 자민당 총재가 15일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간사장을 포함한 당 4역 인사 등을 발표한 뒤 손을 맞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야마구치 다이메이(다케시타파) 선거대책위원장, 사토 쓰토무(아소파) 총무회장, 스가 총재, 니카이 도시히로(니카이파) 간사장, 시모무라 하쿠분(호소다파) 정무조사회장. 도쿄=교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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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은 자민당 내 정책집단(연구모임)을 이른다. 흔히 파벌 수장 이름을 따서 부르지만 각 파벌의 연구모임이 정식 명칭이다. 아베 전 총리가 소속된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는 청화정책연구회(청화회)다. 이번 총재선거에서 후보를 낸 기시다파는 굉지회, 이시바파는 수월회인 식이다.

파벌에 속한 의원들은 매달 회비를 내고 명목상 연구모임을 가진 뒤 식사를 함께 하며 결속을 다진다. 과거엔 할당된 정치자금을 모으고 파벌에 충성함으로써 공천권과 자금력을 쥔 파벌 수장으로부터 선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당선 후엔 파벌의 세를 불려 수장을 당 총재(총리)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주요 당직이나 내각에 진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민당 파벌은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창당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민주당은 1954년 개진당과 합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자민당은 세 정당의 연합체였다. 1956년 12월 총재선거에서 8개 파벌이 경쟁을 벌였지만 1970년대 5개 파벌로 수렴된다. 현존하는 당내 7개 파벌 중 무파벌 인사로 2015년 결성된 이시바파를 제외하면 창당 시 파벌에서 분화했다. 이들은 크게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로 대표되는 자유당 출신 '보수 본류'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일본민주당 출신 '보수 방류'로 양분된다.

당시 파벌이 '정당 내 정당' 역할을 하며 경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선거구제가 자리하고 있다. 한 선거구당 2~6명을 뽑기 때문에 자민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해 집권 여당이 되기 위해 같은 선거구에 여러 명의 후보를 내세워 당선시켜야 했다. 각 파벌 출신 후보들이 서로 다른 정책을 내세워 유권자의 선택을 받으며 의석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다 1996년 중의원선거부터 소선거구제 및 비례대표를 도입한 것은 전환점이었다. 선거구 당 한 명의 후보를 세워야 하고 정당투표가 중요해지면서 당 중심의 통일된 노선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공천권과 자금줄이 각 계파의 수장에서 당 집행부로 집중됐다. 공천과 자금 제공 역할을 상실한 파벌은 이후 총재 선출과 주요 포스트 배분을 중심으로 기능해 왔다.

유사 정권교체로 장기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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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치러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베 신조(오른쪽에서 두 번째) 후보가 당선된 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재와 경쟁 후보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소 다로 후보, 고이즈미 총리, 아베 신임 총재, 다니가키 사다카즈 후보. 도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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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경쟁 파벌 후보를 이기기 위해 제3의 파벌과의 합종연횡이 불가피했다. 그 과정에서 전임 정권과 다른 정치적 지향이나 이미지를 가진 파벌이 집권하면서 이른바 '진자의 원리'가 작동했다. 일본에선 이를 '유사 정권교체'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보수성향 유권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고 자민당 장기 집권의 원동력이 됐다.

예를 들어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추진했던 보수 강경파(매파)인 기시 노부스케 정권 이후 미일동맹을 중시하고 경제우선 정책을 앞세운 보수 온건파(비둘기파)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정권이 들어섰다. 록히드 사건 등 금권정치로 얼룩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정권 이후엔 1974년 청렴한 이미지였던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정권이 등장했다. 2001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건강 악화로 쓰러진 후 밀실 담합으로 총리에 올랐던 모리 요시로(森喜朗) 정권 다음에는 개혁을 기치로 '자민당을 때려부순다'고 했던 무파벌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을 선택했다.

주요 파벌이 치열한 세 대결을 벌이면서도 최소한 여론의 풍향을 의식하면서 선택한 결과였다. 그러나 고이즈미 정권 출범 후 19년이 지나는 동안 민심을 등에 업은 무파벌이나 소수 파벌 후보가 다수 파벌을 압도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파벌 약화 속 아베의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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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4년 12월 치러진 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당시 자민당과 공명당은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의 확보해 압승을 거뒀다. 도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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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 타파를 외치며 집권한 고이즈미 정권은 선거를 통해 의원들을 대폭 물갈이했고 초선 의원들의 파벌 가입을 금지했다. 점점 영향력이 줄어든 파벌은 2009년 중의원선거에서 민주당에 정권까지 뺏기며 결속력마저 희미해졌다. 야당으로서 내각 등 주요 포스트에 진출할 기회마저 사라진 상황에 의원들이 파벌에 충성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2년 9월 강경파인 아베가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고 12월 중의원선거 압승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파벌은 또 한번의 변화를 맞았다. 아베 총리는 재집권 후 7년 8개월여 장기집권 동안 여섯 차례의 전국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아베 1강' 체제를 확고히 했다. 당직과 내각의 인사권으로 자신에게 협력하는 파벌에 주요 자리를 배분했지만 대립한 파벌은 외면했다. 이전처럼 공천과 자금력이 없어진 파벌이 비주류로 전락할 경우 주요 자리 배분이란 기능까지 수행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유력한 총재 후보가 없는 파벌은 무리하게 자파 후보를 내세우기 보다 차라리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아베 총리 파벌)에 협력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른바 '총주류파 체제'에 안주하면서 협력을 통한 자리를 보전하는 게 당면 목적이 됐다. 이는 아베 재집권 후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015년 선거에선 아예 경쟁자가 없어 아베 총리가 무투표 당선됐다. 2018년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 혼자 나섰으나 주류 파벌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시바파는 향후 인사에서 찬밥 신세였다. 그가 이번 자민당 총재에서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지만 정작 당내 국회의원 투표에서 꼴찌에 그친 이유다.

아베 전 총리와 같은 보수 방류에서 분화한 강경파들이 장기 집권했고 다른 파벌들은 이에 영합하는 환경에선 과거와 같은 파벌 간 노선 경쟁은 쉽지 않았다. 평화헌법 개정을 두고 상대를 견제했던 보수 본류와 보수 방류 간 경쟁이 나타나기 어려운 이유다. 이데올로기 색이 강했던 아베 정권과 각을 세워 총재 선거에 나섰다가 패배하면 비주류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스가는 아베의 아바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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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앞줄 가운데) 일본 제99대 총리가 16일 취임 후 도쿄 총리관저에서 내각 각료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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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총리는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96년 중의원선거에서 중앙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오부치파(현 다케시타파)와 고가파(현 기시다파)에 소속했다가 2009년 당 총재 선거를 끝으로 무파벌을 유지해 왔다. 파벌이 약화하기 시작한 시기에 정계에 발을 들인 후 파벌에 얽매이지 않은 채 무파벌인 젊은 의원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왔다. 비록 파벌에 힘을 빌어 정권을 잡았지만 아베 전 총리와는 태생적 배경이 다른 것은 이른바 '스가 색깔'을 기대하게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당선 과정에서 5개 파벌에게 빚을 진 그가 당선 후 첫 인사에서 전권을 행사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제 당 집행부 인사와 개각의 면면은 파벌들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관측에 무게를 실어 준 계기였다. '아베 없는 아베 내각' '아베 내각의 아류'라는 비아냥을 듣는 이유다.

주요 파벌들이 파벌 내 후보까지 주저 앉히면서 무파벌인 스가를 지원한 배경에는 잔여임기 1년을 채우는 총재이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아베 정권에서 구축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내년 임기 3년의 총재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진검 승부를 벌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가 총리가 파벌들의 생각처럼 1년짜리 잠정정권으로 만족할지는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가 자민당 총재선거 과정에서 "예전에는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ㆍ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지향한다"고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권 2인자인 관방장관 시절 모델로 삼은 히데나가가 아니라 1인자를 지향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첫 인사에서 파벌 정치의 역학을 답습했음에도 스가 내각의 지지율은 60~70%대로 역대 3위 수준이다. 내각 및 자민당 지지율의 동반상승으로 중의원 해산 카드를 활용해 장기 집권을 위한 새 판 짜기에 나설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스가 내각에서 첫 입각한 각료가 5명(25%)으로 아베 내각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중의원 해산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1인자가 되는 데 파벌을 적극 활용했고 당내 구심력을 확보할 때까지는 아베 계승을 외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스가가 당의 얼굴로 나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다면 다음 개각에서는 자신의 색깔을 보다 드러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도쿄= 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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