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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명함·청첩장 쓸 일이 없으니…인쇄업계도 코로나에 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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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소리 끊기고 인적 뜸한 을지로 인쇄골목…"폭탄 맞은 것 같다"

연합뉴스

작업 중인 인쇄소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중구 인현동의 한 인쇄소에서 업체 사장 김모(57)씨가 작업을 하고 있다. 2020.10.1 norae@yna.co.kr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40년 넘게 이 자리에서 달력을 만들어 왔는데, 이런 불황은 정말 처음입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을지로 3가역와 충무로역 사이에 있는 을지로18길은 중소규모 인쇄소가 5천여곳 몰려 있어 '인현동 인쇄골목'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수십년간 달력을 인쇄해 온 김재성(63) 씨는 한숨을 쉬었다. 어두운 표정의 그는 "거리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것도 처음"이라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종이가 사라지고 있다. 대면 접촉이 없으니 명함도 없어지고, 공연장과 영화관에 쌓아둘 포스터와 팸플릿도 사라졌다. 결혼식을 열지 못하자 예식장 업체들의 청첩장, 식권 인쇄 주문도 줄었다. 기업들은 연말 다이어리와 달력 제작을 미루고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28일 찾은 인현동 인쇄골목은 조용했다. ○○인쇄, ○○프린트, ○○문화사 같은 간판이 빼곡한 거리엔 기계 돌리는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인쇄물을 가득 싣고 다녔을 삼륜 오토바이 '삼발이'도 자취를 감췄다.

기계를 돌리던 김모(57)씨는 "예전엔 국제 행사 발표문 책자 주문이 많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전혀 없다. 물량이 50%는 줄어든 것 같다"며 "재난지원금을 받아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쇄골목 입구에서 만난 한 상인은 "35년을 여기서 일했는데 가게 월세를 못 낼 정도로 일이 없기는 처음"이라며 "거리 통행량도 예전의 반도 안 된다"고 했다.

주로 학원 교재들을 인쇄해왔다는 이모(59)씨는 "폭탄을 맞았다"는 표현을 썼다.

이씨는 "여기서 1989년 1월 1일 사업자 개시를 했는데 지금 단골들 주문이 다 끊겼다"면서 "2층까지 기계가 4대인데 하나도 가동을 안 하고 있다"고 했다.

다이어리 제작업체 사장 A씨는 '다이어리 대목'인 10월을 앞두고서도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대기업들은 6∼7월에 주문을 넣기도 하는데 많이 줄었다. 거래처에 전화하면 이번엔 안 만든다는 곳도 많다"면서 "여기 업체들은 다 죽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한산한 인현동 인쇄골목
[촬영 송은경]



인쇄공을 대상으로 먹을거리를 팔던 가게도 덩달아 불황이다.

인쇄골목에 있는 분식집 주인 B씨는 "예전엔 하루에 50만원 벌었다면 지금은 10만원 벌기도 힘들다. 장사가 아예 안된다"면서 "종업원은 내보냈고 딸과 둘이 운영하고 있다. 이미 적자인데 문을 안 열 수가 없어 그냥 열고 있다"고 했다.

인쇄 수요가 확연히 줄어든 건 통계로도 확인된다.

1일 한국제지연합회의 국내 제지산업 월별수급 현황에 따르면 올해 1∼7월 인쇄용지 생산량은 약 136만t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9.7% 감소했다. 연합회 관계자는 "인쇄용지는 생필품에 해당하는데 생산량이 10% 줄어드는 건 엄청난 일"이라며 "조사 이래 5%를 넘은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인현동 인쇄골목은 책을 주로 인쇄하는 파주 출판단지와 다르게 '인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쇄하고, 대규모가 아닌 중소규모 인쇄공들이 밀집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은 대부분 경력 30년 이상의 '장인'(匠人)으로 통한다.

소상공인인쇄협동조합 관계자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많이 넘어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인쇄는 책만 만드는 게 아니라 전 산업에 걸쳐져 있는 편집·디자인 기술"이라며 "그런 전문 기술인들이 일감이 없어 사라질 위험에 있다"고 말했다.

nor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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