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8 (목)

조상 제사에 방화 살인, 항소심도 무기징역… 그 가문에 무슨 일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때 일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조선시대 명문 세도가(勢道家)의 반열에 올랐던 한 가문에 지난해11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족간에 발생한 사건이라 충격이 꽤 컸다. 사건 발생 1년이 다 돼가지만, 이 가문에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큰 상처로 남아있다.

조선일보

지난해 11월 7일 충북 진천군 은암리 한 문중 야산에서 A(82)씨가 시제를 지내던 종중원들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뼈대 있는 집안에서의 상상하지 못할 끔찍한 방화 살인

이 가문의 자손들은 매년 음력 10월이면 선조의 선영이 있는 충북 진천군 초평면에 모여 시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11월 7일이 시제 날이었다. 이들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제사상에 올려두고 시제를 시작했다. 여기 모인 이는 모두 20여명. 오전 10시 35분쯤 종중원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축관의 축문(祝文) 낭독을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종중원들 주변으로 뜨거운 불기둥이 솟구쳤고 일부 종중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같은 종중원인 A(82)씨가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것이었다. A씨의 범행으로 종중원 B(84)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나머지 9명의 종중원도 화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B(80)씨와 C(79)씨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A씨는 범행을 저지르고 곧바로 미리 준비한 독극물을 마셨지만, 치료를 받고 호전됐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종중 땅 문제로 오랜 기간 갈등을 겪었고 이에 화가 나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조선일보

지난해 11월 7일 충북 진천군 은암리 한 문중 야산에서 A(82)씨가 시제를 지내던 종중원들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충북소방본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종중 부동산 ‘매각’, 갈등의 ‘씨앗’…결국 법정 구속까지

조선시대에 왕비도 배출했던 이 명문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극의 시작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문중 선산이 있던 충북 진천군 초평면 은암리에서 2009년 산업단지 개발 사업이 진행됐다. A씨는 당시 종중의 감사와 종무 위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해 9월쯤 종중의 위임을 받아 종중 소유 땅 1만여 ㎡를 한 개발업자에게 2억 7500여만원에 팔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1월 22일 업체로부터 매매대금 중 3000만원 중 자신의 계좌로 송금받아 생활비로 사용하는 등 8차례에 걸쳐 1억 2200만원을 받아 가로챘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이 발각돼 A씨는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A씨는 재판과정에서 “분신을 시도하는 등 내가 노력해서 토지 매매대금을 받아 냈기 때문에 종중 돈이 아닌 내 돈”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재판부는 1억 1000만원을 공탁(供託, 법령의 규정에 따라금전·유가증권·기타 물품을 공탁소에 맡기는 것)한 점 등을 참작해 A씨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를 했지만, 오히려 항소심에서 법정구속 되는 일이 벌어졌다. 1심 재판과정에서 양형(量刑, 형량을 결정하는 일)에 참작된 공탁에 문제가 발견된 것이다. A씨가 종중원들이 공탁금을 받지 못하도록 공탁통지서에 종중원의 주소가 아닌 자신의 주소를 적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A씨는 결국 2016년 12월15일 괘씸죄로 법정구속돼 차가운 교도소에 들어가야 했다.

A씨는 종중 회장 B(84)씨와 총무의 주도로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해 자신이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생각하며 이들에 대해 원망을 했다.

조선일보

지난해 11월 7일 충북 진천군 은암리 한 문중 야산에서 A(82)씨가 시제를 지내던 종중원들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뉴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계획된 범행, 조사과정에서는 범행 ‘정당화’

그러던 중 또 한 번 일이 발생했다.

A씨는 종중 부동산 매각 과정에서 비리가 있다며 일부 종중원과 매수인을 고소했다. 하지만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고, 오히려 A씨가 종중 임원 명의의 문서를 위조한 사실 등으로 기소가 된 것이다. A씨는 이때 B씨 등을 살해할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A씨는 지난해 10월 종중원이 많이 모이는 시제 날을 범행 날짜로 정했다. 그리고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휘발유가 잘 뿌려질 수 있도록 휘발유통을 미리 다듬고 뿌리는 연습도 했다고 한다. 시제 이틀 전에는 휘발유 10리터를 구매, 그 중 5리터를 준비해 둔 통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보자기로 덮어 시제 장소에 가져다 두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당시 “피해자들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아야 했다는 등의 진술”을 하며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일보

청주지방법원/신정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판부, “고귀한 생명 지키기 위해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지난 5월 A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적인 복수를 위해 사전에 범행을 계획하는 등 죄질이 나쁘다"라며 “피해자들은 이 범행으로 고통 속에 목숨을 잃거나 상당한 후유증 속에 여생을 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살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인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며 “이는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한 중대한 범죄로,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차단하고 잘못을 참회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A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다.

최근 열린 항소심에서도 재판부의 판단은 원심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대전고법 청주재판부 형사1부(지영난 부장판사)는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A씨에게 원심과 같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80세가 넘는 고령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범행 수법이 매우 잔혹하다”라며 “그로 인해 3명이 숨지고 7명이 다치는 등 그 결과가 매우 중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리 범행 도구를 준비해 휘발유를 뿌리는 연습을 하고, 이것을 범행 현장에 가져다 두는 등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이어 “피고인이 피해 회복을 위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용서받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원심의 형이 합리적 범위를 벗어났다고 보이지 않는다”라고 판시했다.

[신정훈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