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자기편 봐주고 반대편은 티끌도 처벌...이게 독재의 술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조선일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진핑 정부의 풍자. 반체제 만화가 바듀차오(Badiucao)의 작품/ foreignpolicy.com>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7회>

독재정권은 법을 악용한다. 자기편의 들보는 덮어주고, 반대편의 티끌은 처벌한다. 반대세력은 억압하고, 비판집단은 탄압한다. 의법(依法)통치를 가장하지만, 독재정권의 법률행위는 편파적이고, 파당적이다.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이다. 독재자는 법의 보편성, 공정성, 합리성을 무너뜨린다. 법치의 파괴가 바로 독재의 시작이다.

법에 따라 집행한다며 반대세력만 골라 처벌

사법적 “내로남불”을 학술용어로는 선택적 법집행(selective enforcement of law)이라 한다. 한비자(韓非子)가 제시한 전제군주의 통치술이다. 가혹한 법령을 장시간 집행하지 않으면, 백성 대부분이 범법자가 되고 만다. 그때 군주는 반대자만 표적삼아 처벌할 수 있다. 한비자에 따르면 “이형거형(以刑去刑)”이다. “형벌로 형벌을 없앤다!”는 뜻! 본보기로 몇 명만 처벌하면 모두가 복종한다는 이야기다.

선택적 법집행은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통치술이다.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법률은 극히 엄격한데, 1980년대 이래 법집행은 대체로 느슨했다. 그 결과 대부분 공직자들은 “부패”를 생활화했다. 2012년11월 “호랑이와 파리 떼”의 척결을 목표로 중국정부는 연평균 50여명의 고위직 간부를 구속했다. 당·관·군 고위직의 30퍼센트가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조족지혈이었다. 게다가 부패혐의로 처벌된 최고위직 부패관료 다섯 명은 모두 중국공산당 반(反)시진핑 세력의 핵심인물들이었다.

베이징 인민대학의 장밍(張鳴, 1957- ) 교수는 반부패 운동을 주도하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중공중앙의 지침만을 따른다”고 비판했다. 베이징 대학의 허위에팡(賀衛方, 1960- )교수는 진정한 “반부패개혁”의 실현을 위해선 절대다수의 관원들이 사형을 당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법치의 파괴를 규탄하는 양심의 경고였다.

조선일보

<문혁시절 전형적인 비투(批鬪, 비판투쟁)의 현장. 무죄추정의 원칙, 피의자 인권보호 등 인간의 기본권을 모두 무시한 인민재판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투쟁 대상의 목에 걸린 팻말에 각각 “삼반분자,” “완고한 교화불능의 주자파,” “대반도”라 적혀 있다./공공부문>


민주집중제 내세워 삼권분립 부정

중국의 헌법은 삼권분립을 부정한다. 대신 입법부와 행정부를 하나로 묶는 “의행(議行)합일”을 강조한다. 형식상 행정부와 사법부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종속된다. 행정, 입법, 사법의 권력이 통일된 “단일체(單一體) 국가”의 이상이지만······.

전국인민대표회의는 명목상의 국가 최고의 권력기구일 뿐이다. 국가권력의 핵심은 바로 중공 중앙상무위원회다. 전국인민대표는 중공중앙 상무위의 거수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중국헌법에 명시된 “인민민주독재”와 “민주집중제”의 당연한 귀결이다.

특히 문혁 시기, 중국의 인민은 인치(人治)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1967년 이래 전국 지방정부는 “혁명위원회”에 장악됐다. “일원화 영도(領導)”를 표방한 혁명위원회는 지방정부의 당, 정, 군을 장악했다. 그 결과 인민법원과 인민 검찰원(檢察院) 등 각 지방의 사법기구는 군조직의 감시 하에 놓였다. 혁명위원회에 관해선 차후 상술하고, 문혁 시절 사법살인의 케이스를 살펴보자.

문화혁명의 시대, 사법 살인의 사례

1970년 3월 5일, 목요일. 베이징 노동자 경기장에는 10만 명의 군중이 꽉 들어차 있었다. “타도하라!” 혁명의 구호를 복창하는 성난 군중들 앞에 19명의 정치범들이 끌려 나왔다. 단상에 세워진 19명의 머리 위에 “사형, 즉시 집행”이란 판결이 선포됐다.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끌려갔고, 판결에 따라 곧 총살당했다. 가족들도 그들의 최후를 전혀 알지 못했다.

19명의 사형수들 사이엔 스물여덟 살의 위뤄커(遇羅克, 1942-1970)도 끼어 있었다. 그는 베이징 인민 기기(機器)공장의 견습공이었지만, 정치평론으로 문명을 날린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1966년 2월 13일, ‘문회보(文滙報)’에 사인방 야오원위안의 비평을 반박하는 그의 평론이 실렸는데, 큰 방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의 진정한 출세작은 혁명세력의 신분세습을 비판한 “출신론(出身論)”이었다. 1967년 1월, 동인지 “중학문혁보(中學文革報)”에 여섯 차례에 걸쳐 게재된 “출신론”은 대중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일보

<1967년 1월 18일자 “중학문혁보” 창간호에 실린 위뤄커의 “출신론”. 베이징 기계공장의 견습공 위뤄커는 이 글에서 “혈통론”을 봉건시대의 낡은 사상이라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사상은 실천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주장으로 출신성분에 따른 신분차별의 부당함을 고발한 이 글은 전국적 반향을 불러왔다. 결국 1968년 1월 5일 체포되었고, 1970년 3월 5일 19명의 정치범과 함께 베이징 노동자 운동장에서 개최된 10만인 대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즉시 총살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혈통론 비판한 워러커, 형장의 이슬로

지난 회 살펴봤듯, 문혁 초기 출신성분이 좋은 홍위병들은 “부모가 영웅이면 자식은 호걸”이라는 구호로 신분세습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당내 당권파의 축출을 목표로 했던 중앙문혁 소조는 “혈통론”을 반동이라 비판했다. 1966년 12월 말 “혈통론”을 제창했던 탄리푸(譚力夫, 1942- )는 투옥됐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위뤄커의 “출신론”은 출판 직후 널리 유포됐는데, 그의 정연한 논리가 되레 중앙문혁소조의 신경을 건드렸다.

“출신론”에서 위뤄커는 우선 당시의 “혈통론”이 신분제적 발상이며, 그 이론적 기반은 자산계급의 형이상학이라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혈통론”이 “사회주의 제도 아래 다시금 새로운 특권계급을 만드는 반동의 카스트제도”라 질타했다. 신분제적 차별이 초래할 중장기적 사회적 문제를 분석한 후, 그는 “표현의 중요성”(重在政治表現)을 강조했다. 출신성분 보다는 개개인의 구체적 언행, 표현,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인데, 그 근거는 바로 마오쩌둥의 발언이었다.

조선일보

<1967년 위뤄커 최후의 사진/ <<遇羅克: 遺作與回憶>>에서 발췌>


위뤄커는 철저하게 마오쩌둥 사상의 내에서 논리를 전개했다. 1957년 마오쩌둥은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의 대학생들이여, 비록 많은 사람들이 비(非)노동자 집안 출신의 자녀라 할지라도 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애국자며, 모두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마오쩌둥의 발언에서 혁명의 공리(公理)를 도출하고, 그 공리에 따라 “혈통론”의 불합리를 논증하는 영리한 레토릭(rhetoric)이었다. 누구든 위뤄커를 공격하는 순간, 마오쩌둥을 부인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위뤄커는 바로 그 “출신론” 때문에 필화에 휘말려 형장의 이슬로 스러졌다.

역시나 문제는 위뤄커의 출신성분이었다. 그의 부친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전력 기술자였다. 전문분야에서 기술혁신으로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는 1957년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로 몰려 노동교양형에 처해졌다. 모친 역시 우파로 몰려 갖은 수모를 겪고 극빈의 생활고를 견뎌야 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위뤄커였지만, 우파의 낙인 때문에 세 번이나 대학입학을 할 수 없었다. 위뤄커의 “미천한” 출신성분이 문제였을까? 일개 정치천민, 흑오류(黑五類, 검은 다섯 부류)의 아들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혁명세력의 권력세습을 비판한 게 문제였을까?

대독초(大毒草)로 낙인, 법의 이름으로 처형

1967년 4월 14일 중앙문혁소조의 어용(御用) 논객 치번위(戚本禹, 1931-2016)는 위뤄커의 “출신론”을 대독초(大毒草)라 선언했다. 문혁 시기 “대독초”의 낙인은 곧 사형선고였다. 곧 바로 위뤄커에 미행이 붙고 신변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68년 1월 5일, 위뤄커는 체포됐다. "반혁명 여론 조성, 반동사상의 유포, 암살활동 추진 음모, 반혁명조직 결성 등의 죄명이 들씌워졌다. 2년 후 그는 10만 명 앞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즉시 처형됐다. 마지막 순간 그의 몸은 문혁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진 셈이었다.

1978년 겨울, 위뤄커의 모친은 끈질기게 아들의 명예회복을 요청했다. 1979년 11월 21일, 베이징시 인민법원은 위뤄커의 무죄를 선고하고, 그의 부모에 약간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대체 한 편의 평론이 무엇이기에 중공정부는 법의 이름으로 그를 죽여야만 했을까? 일개 견습공의 정연한 논리가 두려웠던 것일까? 지금도 중국 안팎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그를 “중국인권의 선구”라 칭송하고 있다. 독재정권은 제멋대로 법을 비틀어 위뤄커를 죽였지만, 좌익독재 특권세력의 자기모순을 꼬집은 그의 “출신론”은 “정신적 노예의 해방선언”이라 일컬어진다.

조선일보

<“위대한 영수 마오주석께서 홍위병을 검열하시다!”/ 공공부문>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26회> 누가 알았을까 귀족이 될 줄… 권력 잡고 특권층 된 정의의 사도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