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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노원명 칼럼] 누가 바다괴물에 족쇄를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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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미성년이었던 내 또래의 세대 특성중 하나는 성년이 된 이후로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에서 국가 우위를 경험해본적 없다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임기 마지막해 대학에 입학했을때 국가는 이미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물' 소리를 듣던 대통령과 정부는 거의 매일 신문에 난타당했고 검찰은 정권 실세들을 잡아들였다. 국무위원들은 국회에서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군사 권위주의 국가가 불과 몇년 만에 시민사회 우위 국가로 탈바꿈한 희귀한 사례였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이 구도는 자연법칙처럼 굳어졌다. 어느 정권이나 시민사회 지지를 엎고 호기롭게 출범했지만 그 기세는 임기 중반을 넘기지 못했다. 민심은 한순간 돌아섰다. 여론 포착에 능한 언론과 검찰의 공명심이 불타오르고 스캔들이 줄을 이었다. 임기초 70~80%를 넘나들던 지지율은 한자리수로 떨어진다. 대통령의 아들들, 대통령의 형이 구속당하고 대통령 본인의 퇴임 후가 위태로워진다. 여기까지는 모든 정권이 겪었던 과정이다.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시민사회는 마침내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시민사회 우위가 거기서 꼭지점을 찍었다. 불운한 헌정사는 백번 한탄해야겠지만 그 와중에도 자유와 민주주의는 공고해졌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 법칙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 정부들어 여러 스캔들이 터졌고 지금도 다발성으로 진행중이다. '게이트 공화국'이라 불렸던 김대중 정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차이는 김대중 정부는 집권 4년차 시점에 '식물'에 가까웠는데 이 정부는 끄떡도 없다는 것이다. 식물이 된 것은 정권이 아니라 검찰이다. 물기는 고사하고 짖지도 못한다. 공직은 일사불란해서 내부고발은 커녕 이견조차 보기 어렵다. 법원에서 여권에 불리한 판결을 본지 오래됐다. 신문은 비판하지만 그 메아리는 비판진영 내에서만 맴돌 뿐이다. 국회에 출석한 장관들은 야당 의원 질의에 피식피식 웃는다. 그건 그나마 점잖은 편이고 "소설 쓰고 있네"같은 말이 막 나온다. 국무위원이 국회의원을 조롱한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이 정부를 야유하는 은유일텐데 내 세대에겐 사실 적시에 가깝다. 성년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그래도 국정 지지율은 40%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 정부를 과거 정부와 구분짓는 결정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40%를 문재인 정부의 절대지지율로 여긴다. 내일 당장 대한민국이 망해도 깨지지 않을 지지율 말이다. 결집된 40%는 부유하는 나머지 60%보다 몇몇배 강력하다. 어떤 선거든 이길수 있다. 머리 빠르게 돌아가는 공무원, 검사, 판사, 기타 엘리트들이 '20년 집권'에 베팅한다. 여권 모임에서 '20년'을 외친 어느 국책은행장의 건배사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앞서 모든 정권이 민심의 변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정부 뿌리인 노무현 정부는 임기말 지지율이 한자리수였다. 어째서 이 정권은 다른가. 노무현의 팬덤은 이 정권못지 않았고 이 정부가 노무현 정부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아니다. 달라진 건 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다. 40% 콘크리트 지지율의 저변에는 시민사회의 자기분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부 이전에도 시민사회는 복잡다기했지만 도덕적 정의관이 개입되는 문제에 있어서 압도적인 여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정부 실정과 부패를 대했을때 그 자체로 평가하는 '순수한 분노'가 이에 해당한다. 이 분노의 뇌관이 점화되면 민심은 한꺼번에 돌아섰다. 박근혜 정부 지지율은 5% 아래까지 내려갔다. 지금은 순수한 분노를 당파적, 선택적 분노가 대신하고 있다. 내편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상대 진영이 그로부터 반사이익을 얻는다면 못본척 한다. 분노라는 감정은 상대편이 잘못했을 때만 조건부로 작동한다. 이것이 깨지지 않는 국정 지지율 40%의 요체다. 반대 진영은 그에 훨씬 못미치고 결집도도 떨어지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당파적 분노에 함몰돼 있다. 순수하게 사안 자체로 판단하는 사람은 희귀해졌다.

이 정부에 이르러 시민사회 분열이 나타난 이유는 탐구할 주제다. 누적된 빈부 격차와 계층 갈등이 이에 천착하는 정부와 화학작용을 일으킨 결과일수도 있고 선동에 취약해진 미디어환경 변화에 영향받았을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불러온 결과다. 시민사회가 분열되면서 '국가'가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정부와 정부를 움직이는 엘리트들이 시민사회를 의식하지 않는다. 조국과 추미애 현상은 이전의 시민사회 우위 구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23전23패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부도 그런 식으로 버티지 못했는데 이 정부는 가능하다. 광화문에 차벽쌓는 일이 번거롭다고 아예 높이 3m짜리 펜스를 특수 제작한다고 한다. 시민적 자유와 기본권을 말해봐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비판 여론은 산발적이고 지지층은 똘똘 뭉쳐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 세대는 처음 경험하는 국가 우위다. 생경하기 짝이 없다.

이 주제와 관련된 책이 최근 번역돼 나왔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공저 '좁은 회랑'에서 토마스 홉스를 인용해 국가를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회가 있는데 리바이어던이 없는 무정부 사회, 리바이어던이 무소불위로 날뛰는 독재 사회는 불행하다. 시민사회와 국가 권력 사이에 균형이 존재하는 '족쇄 찬 리바이어든'이 살기좋은 사회다. 이걸 성취하는 나라는 소수이고 그 길로 가는 길은 회랑처럼 좁다. 저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을 족쇄 찬 리바이어든의 대표사례로 극찬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한국 독자들을 너무 의식한거 아닐까.

"족쇄 찬 리바이어든이라 할지라도 무한정 신뢰해서는 안된다. 리바이어든은 족쇄를 찼든 안 찼든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독재의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울 수 있을 때만 세상은 살만하다. 지난 수십년간 족쇄를 찬 채로 비교적 얌전했던 리바이어든이 거칠게 포효하고 있다. 어쩌면 족쇄는 이미 풀렸는지도 모른다. 누가 이 족쇄를 다시 채울 것인가. 분열된 시민사회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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