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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더오래]무조건 독극물이라고?…억울한 염산과 양잿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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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태호의 잘 먹고 잘살기(88)



염산(鹽酸)하면 그 무시무시한 염산테러를 연상하고 양잿물이라 하면 생을 마감하는 독극물쯤으로 생각한다. 맞기도하고 틀리기도 하다. 이들은 농도가 높으면 살을 태우고 옷에 구멍도 내지만 희석하면 빙초산이나 중조(소다)처럼 먹어도 상관없는 물질이라서다. 염산과 양잿물을 섞어주면 중화되어 소금이 될 따름이다. 그런데 식품 가공에 염산이나 양잿물(가성소다)을 썼다 하면 기겁을 하고 여지없이 나쁜 음식으로 매도하는 풍조가 만연해있다. 과연 그럴까.

우선 우리의 위 속에서 분비되며 소화를 돕는 위산이 다름 아닌 바로 염산이라 하면 아마 놀라실 거다. 염산은 위벽에서 끊임없이 분비돼 음식물의 소화를 돕고, 음식과 함께 딸려 들어온 미생물을 살균하여 병원성을 제거하는,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다. 동시에 위 속 환경을 산성으로 변화시켜 효소에 의한 단백질의 소화를 돕는다. 이때의 pH는 2 이하로 내려간다. 식초의 10배 이상 강한 산이다. 이런 위산의 분비가 원활하지 않으면 저산증이 되어 오히려 소화에 장애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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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산이나 양잿물' 하면 테러나 독극물부터 연상된다. 하지만 이들은 희석하면 빙초산이나 중조(소다)처럼 먹어도 상관없는 물질이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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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산의 분비가 많아도 문제가 되긴 한다.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의 원인을 제공해서다. 거친 음식이나 약물에 의해 위벽에 흠집이 나거나 어떤 원인에 의해 염증이 생겼다면 위산에 의해 속 쓰림이 시작된다. 이게 위염이라는 증상이다. 입안 상처에 식초를 먹으면 따가움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염산이 식도로 역류하면 보호막이 없는 식도 하부에서는 염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건강한 위에는 점액질이 나와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보통은 속 쓰림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친 음주나 스트레스 등 어떤 요인에 의해 염증이 생기면 위산에 노출되고 팹신(단백질분해효소)의 작용으로 위벽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위궤양으로 발전하고 심하면 구멍(천공)이 생겨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이를 막기 위해 위산을 중화하는 제산제를 사용하거나 위산분비를 억제하는 치료약을 쓴다.

한편 양잿물도 독극물로 치지만 염산으로 중화하면 소금으로 되어 인체에 무해하다. 희석하면 당연히 먹어도 상관없다. 과거 우리는 양잿물보다 잿물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그럼 잿물은 뭐고 양잿물은 뭔가. 양(洋)자가 붙었으니 서양잿물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가성소다(NaOH)의 우리말이다. 우리의 잿물은 말 그대로 재에 물을 부어 녹여낸 것을 일컫는다. 볏짚이나 건초를 태워 완전히 연소시켜 하얗게 변한 재를 헝겊 위에 올려놓고 물을 붓고 내리면 재속 미네랄, 특히 알칼리성이온(미네랄)이 녹아 나온다. 이를 잿물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받은 물은 양잿물처럼 강한 알칼리성을 띤다. 즉 식물에 많은 칼륨(K) 등의 알칼리이온이 물에 녹아 강한 알칼리용액을 만드는 것이다. 농도가 묽으면 졸여서 농축하기도 한다. 양잿물이 없던 시절 염색이나 도자기에 유약을 입힐 때 썼다. 지금도 이를 고집하는 장인이 있다.

소금물(NaCI)을 분해하면 염산(HCI)과 양잿물(NaOH)이 되고, 또 이 둘을 합치면 다시 깨끗한 소금이 된다. 이름만 들어도 살벌한 둘이 합치면 소금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위험할 것 같은데도 실제는 식품제조에 이들이 가장 많이 쓰인다는 것,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그럼 이렇게 탈도 많은 염산과 양잿물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쓰이는가를 보자.

우리가 늘 먹는 간장 중에 산분해간장(혹은 화학간장)이라는 것이 있다. 양조간장과 일정 비율로 섞어 혼합간장이라는 이름으로 시판된다. 이 산분해간장이 독극물로 치는 염산을 처리해 만든다. 탈지대두에 고농도의 염산을 넣고 장시간 콩 단백질을 가수분해해 아미노산액을 얻은 다음에 양잿물로 중화시켜 만든 조미액, 그것이 바로 산분해간장이다. 물론 여느 가공식품처럼 여러 첨가물을 넣기는 한다. 당연히 염산은 양잿물로 중화하기 때문에 간장 속에 두 물질은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만든 것이 도대체 맛이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실제 간장 중에서는 가장 맛이 좋다는 정평이다. 이유는 뛰어난 단백질 분해율에 의해 아미노산이 많이 용출되고 여러 화학반응으로 만들어지는 풍미성분 때문이다. 대신 우려하는 부분은 있다. 산으로 장시간 분해해 인체에 해로운 3-MCPD이라는 2군 발암물질(2B)이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량에다 식품위생법으로 기준치를 엄격하게 정해놓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발암물질하면 다들 불안해하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 많다. 젓갈, 햄, 소시지, 술, 담배는 1군이고(시중에는 1급으로 오인), 휴대폰, 심지어 우리의 김치(절임음식), 튀긴음식도 2군B로 분류한다. 국제암연구소가 정한 발암물질에는 위험한 것도 있지만 개중에는 종이호랑이와 같은 것도 흔하게 있어 일일이 전전긍긍할 일은 아닌 듯싶다.

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있다. 염산을 가끔 일부 김 양식에 불법으로 사용하다 단속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곤 한다. 김 양식에 방해가 되는 파래, 매생이, 규조류 등의 제거용이다. 염산처리가 생산성뿐만 아니라 품질향상에 기여하고 그 효과와 가성비는 다른 유기산에 비해 훨씬 좋다. 아니함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염산을 만드는 원료는 바닷물의 소금이라 했다. 소금물을 전기분해해 얻은 염산을 다시 바다에 내보내면 자연으로 회귀하는 셈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고 중화돼 인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실제 김에 묻어 들어오지도 않는다. 설사 조금 있다 한들 문제는 없다. 우리 위 속에는 그보다 더한 다량의 염산이 펑펑 쏟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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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극물의 유해성은 양이 결정한다. 진하면 독이 되고 연하면 무해하거나 약이 된다. 벌독, 뱀독, 전갈독, 보톡스 등이 이를 말해 준다. [사진 pix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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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산은 간장의 제조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주 접하는 물엿이나 포도당 제조, 사과나 황도, 포도의 껍질을 벗기거나 세척하는 데에도 자주 사용한다. 비누 만들 때도 양잿물을 쓴다. 세탁물에 양잿물을 조금 넣어주면 때가 잘 빠진다. 목욕물에 조금 섞어주면 물이 연수가 되어 매끄럽고 비누가 잘 풀린다. 옛날 비누가 귀했던 시절 비누 없이 물로 대충 씻은 애벌빨래를 옹기에 넣고 기름기 많은 쌀겨와 양잿물(혹은 나무 태운 재)을 섞고는 며칠 쟁여두면 자연히 비누가 만들어져 찌든 때를 빼준다는 것, 이 기막힌 현상을 우리 선조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비누란 기름 속 지방산이 양잿물에 의해 가수분해돼 나트륨 염(鹽)으로 된 것이라는 거, 이 또한 알고 한 것인지 경험으로 얻은 생활의 지혜인지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결론적으로 이런 독극물의 유해성은 양이 결정한다는 것, 진하면 독이 되고 연하면 무해하거나 약이 된다는 사실이다. 벌독, 뱀독, 전갈독, 보톡스 등이 이를 말해 준다. 이들은 치료용으로 자주 쓰이는 맹독성 물질이다. 양에 따라 약이 되고 독이 되는 이런 현상을 어려운 말로는 ‘호르메시스’라 한다. 비유로 몽둥이로 때리면 폭행이 되고 막대기로 문지르면 마사지가 되듯, 바람이 세면 태풍이 되고 약하면 산들바람이 되듯이 말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각종 식품첨가물도 대부분 그렇다. LD50이라는 걸 알지 않나. 동물에 먹였을 때 실험군의 반이 죽는 양이다. 소금에도 설탕에도 LD(Lethal Dose)가 있고 심지어 물에도 있다. 최근 먹거리가 풍부해지니 푸드포비아 케미포비아가 극성이다. 시중에는 식품이나 화학물질에 대해 지나친 공포감을 조성하는 부류가 있다. 이런 영향으로 대중은 인공과 화학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고개를 흔들고 천연, 자연하면 껌벅 넘어간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전부 가공(인공)이고 화학물질이며 인체의 구성성분도 모두 화학물질이다. 그런데도 왜 화학이란 글자에 기겁을 하나. 세간에는 되지도 않은 선무당발 식품 미신이 판을 치고 과학을 이긴다. 이젠 미신이 아니라 과학으로 먹는 시대다. 그들의 감언에 속지 말고 현명해지자.

부산대 명예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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