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월 200만원'도 못버는데 보증·권리금 800만원…택배기사 잡는 족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머니투데이 정경훈 기자] 로젠택배 부산 강서지점 소속 40대 기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 택배업계의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불합리한 업계 관행이 논란이 되고 있다.

기사 김모씨는 유서에서 수익이 최저임금 수준 만큼도 나지 않는 구역을 '보증금'과 '권리금'까지 내고 떠맡게 됐다고 했다. 현장 택배기사들은 보증금과 권리금이 업계의 불합리한 관행 일부라며 본사나 정부가 개입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20일 숨진 로젠택배 기사 김씨…입사 과정에서 보증금·권리금 내

머니투데이

(서울=뉴스1) 임세영 기자 =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택배노동자 죽음의 행렬 끊기 위한 각계 대표단 공동선언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택배노동자 과로사 문제 해결 방안을 촉구하고 있다. 2020.10.21/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1일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과로사위)에 따르면 김씨는 입사 과정에서 보증금 500만원을 대리점(지점)에 지급하고 300만원의 권리금까지 냈다.

김씨는 유서에서 자신이 받는 수수료가 적으며 세금 등을 떼면 본인이 담당한 구역에서는 월 200만원도 못 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구역에서 일할 소장(기사)를 뽑으면 안되지만 업체가 기사를 모집해 보증금을 받고 권리금을 만들어 팔았다고 했다.

로젠택배 소속 기사 A씨는 이 사건을 두고 "여러 택배 기사들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법률상 자영업자와 마찬가지인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기사는 본사가 아닌 지점과 계약을 맺고 일을 한다. 각 지점은 택배 기사가 갑자기 그만 둬 수익이 끊길 상황을 대비해 기사와 계약을 맺을 경우 기사로부터 보증금을 받는다.

A씨는 "다수 지점은 '기사가 물건을 훔치는 등 손실을 입힐 때' '기사가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 기간 전에 별다른 이유 없이 퇴사할 때' 등을 방지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보증금을 요구한다"며 "기사가 아무런 사고 없이 계약 기간을 만료 하고 일을 그만 두면 보증금을 돌려줘야 하는 게 정상"이라고 했다.

이어 "그러나 일부 지점에서는 계약 기간이 끝난 기사가 일을 그만 두려고 할 때 '후임자'를 못 구했다는 이유로 지점이 기사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일이 여전히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김씨 동료 B씨는 "계약서상 '중대형 과실로 손실 발생시 보증금 지급 안한다'는 등 조항이 있는데, 후임자가 없어서 배송이 끊기는 것을 손실로 보기 때문"이라며 "그래도 무사고로 명시된 계약 기간을 마치면 돌려줘야 하는데, 이와 같은 이유를 대면서 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권리금은 전임 기사와 후임 기사에게 자신의 구역을 넘기는 대가로 받는 돈이다. 자영업자가 장사를 시작하려고 세를 들 때 해당 매장을 사용하던 업자에게 제공하는 권리금과 같은 개념이다. 권리금은 전임자가 매기기 나름이이어서 구역에서 내는 매출이 높을수록 오르는 경향이 있다.

A씨에 따르면 한 달에 700만~800만원의 고정수입이 나오는 지역은 권리금이 2000만~3000만원 정도까지 되고 1억원까지 책정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이 택배 일을 시작하려면 자신이 마련해야 하는 차값에 더불어 수백~수천만원에 이르는 권리금까지 준비해야 하는 셈이다.

머니투데이

(서울=뉴스1) 국회사진취재단 =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택배노동자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2020.10.21/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씨는 "권리금을 수수하는 것은 택배 업계의 음성적인 관행"이라며 "이 관행 때문에 월 200만원 수익도 안 나는 구역을 권리금을 붙여 넘기는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한범석 변호사(법무법인 백승)는 "만약 별다른 사고 없이 계약 기간을 마친 기사에게 지점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명백한 위법이자 갑질"이라며 "소송을 진행해 압류를 신청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권리금 주고 받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권리금 때문에 기사들 사이에서 법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며 "새로 일 시작하는 기사들은 계약 전 해당 구역의 매출이나 업무 환경을 정확히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는데, '막상 일을 하고 보니 매출 대비 권리금이 너무 비싸다'고 판단되면 다툼이 발생하곤 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도한 보증금, 권리금 관행…바뀌어야 하지만 신중해야"

A씨는 "보증과 권리금의 문제는 본사나 지점만 개입하면 바뀔 수 있는 문제"라며 "실제로 CJ대한통운 같은 경우에는 보증 관련해 현금을 받지 않고 기사끼리 권리금을 주고받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사가 보증금을 내면 결국 계약 대상인 지점장 등 관리자에게 현금이 들어간다는 것인데, 필요한 것은 현금이 아닌 보증"이라며 "실제로 신용보증재단에서는 기사의 신용도를 평가한 뒤 보증을 서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했다.

한 변호사는 "권리금의 경우 일괄적으로 금지하면 권리금을 주고 일을 시작한 기사들의 반발을 살 수 있어 조치를 신중해야 한다"며 "회사나 지점이 개입하되, 구역의 매출과 실제 소득 등의 가치를 계약 전 기사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는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정경훈 기자 straight@mt.co.k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