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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성폭행 다음날 "사과해" 찾아간 소녀, 이걸 물고 늘어진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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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연합뉴스]


2018년 당시 14살이었던 A양은 친구를 통해 알게 된 B군(당시 18세)과 연락하면서 호감을 가졌다. 두 사람이 사귀기로 한 날, B군은 A양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고 그곳에서 성폭행이 벌어졌다. 다음날 A양은 B군의 집을 다시 찾았다. 어제 일에 대해 사과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군은 다시금 성관계를 요구했고, A양이 거부하자 뺨을 때린 후 또 범행을 저질렀다

재판에 넘겨진 B군은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합의하고 한 차례 성관계를 가졌을 뿐이고 그다음 날에는 A양을 만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A양이 다시 집을 찾았다는 진술을 문제 삼았다. 전날 강간당했다는 피해자가 혼자 가해자의 집을 찾아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간 상황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심 “피해자 행동, 부자연스럽지 않다”



1심 재판부는 A양의 손을 들어줬다. B군이 합의 하에 성관계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경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반면 A양의 진술은 구체적이고 명확하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첫 번째 강간 피해를 당한 다음 날 다시 가해자의 집을 찾아갔다는 것도 특별히 부자연스럽다고 보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만으로 A양의 진술 전체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재판을 받으며 성인이 된 B군은 2019년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2심서 드러난 또 다른 범죄들



B군은 억울하다며 항소했고, 2심 재판에서 그가 받는 혐의는 더 늘어났다. A양과의 사건이 있은 지 6개월 뒤 다른 미성년자 C양을 또 성폭행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른 미성년 피해자 D양을 성추행한 혐의도 받았다. B군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 역시 B군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C양에 대한 성폭행은 인정했는데, 이는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D양에 대한 강제추행도 “만지기는 했으나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2심은 “피해자가 사과만 원할 뿐이었으므로 무고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강간당한 다음 날 스스로 가해자 집에 찾아갔다는 A양의 진술도 “범죄를 경험한 후 보이는 피해자의 반응은 천차만별이기에 반드시 가해자를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A양은 사귀는 사이인 것으로 알았던 B군이 자신을 상대로 느닷없이 강간 범행을 한 것에 의구심을 갖고 해명을 듣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전혀 보일 수 없는 일이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B군의 사건을 모두 병합한 2심은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종전에도 비행을 저질러 다수의 소년보호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6개월의 기간 동안 여성 청소년 2명을 강간하고 1명을 강제추행했으며 강간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받기 위한 조치를 취한 적도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 사건 범행 당시 아직 어린 나이로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점, 강제추행 피해자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했다.



대법 “피해자다움, 신빙성의 근거 될 수 없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 역시 같은 판결을 내렸다. 범행 후 피해자의 일부 언행을 문제 삼아 ‘피해자다움’이 결여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피해자 진술 전체의 신빙성이 없다는 B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정당하다고 선고했다. B군은 징역 5년형이 확정됐다.

‘피해자다움’이란 개념은 지난해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유죄를 판단한 항소심 재판부가 언급하면서 주목받았다. 1심 무죄를 뒤집으며 당시 재판부는 “피해 사실을 곧바로 폭로하지 않고 그대로 비서직을 수행하기로 한 이상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행동이 피해자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최성호 경희대 교수는 저서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서 피해자가 성적 피해를 당한 뒤에도 평소처럼 출근하는 등의 행위는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태도로, 피해자답지 못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최 교수는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피해자상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지 않으면 피해자가 아니라고 성급하게 의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적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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