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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반도체 투자로 ‘세계 1위’…무노조·편법 승계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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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교차한 78년 생애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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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선친이 물려준 그룹을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키웠다. 회장으로 취임한 1987년 9조9000억원이던 삼성그룹 매출액은 그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2014년 338조6000억원으로 34배 늘어났다. 삼성그룹의 약진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이 21세기 경제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핵심 동력이 됐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을 둘러싼 경영권 편법 승계와 불법 비자금 조성, 무노조 경영 등의 논란은 재벌 대기업 위주로 성장한 한국 경제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외로운 유년…가업을 이어받다

12세 때 유학…고독한 성장기
9년간 경영수업 받다 회장에
핵심 사업, 전자·금융 재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과 어머니 박두을씨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3남5녀 가운데 일곱째로 위로 4명의 누나와 2명의 형이 있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제들과 살갑지 못했다고 한다.

다섯 살 무렵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당시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쉐보레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이병철 회장은 어린 아들을 매일 그 차로 혜화초등학교에 통학시켰다. 유난히 자동차를 좋아했던 이건희 회장과 자동차의 첫 번째 인연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병철 회장은 열두 살이 된 그를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유학은 또 다른 외로움의 시작이었다. 거의 매일 영화관을 찾으며 유학 3년간 1000여편의 영화를 봤다. 그의 영화와 음악에 대한 사랑은 이때 싹텄다. 귀국해 서울사대부고에서 2년간 레슬링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맡았다.

와세다대학에 입학하면서 1961년 두 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은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회장은 1967년 삼성 소유의 동양방송 사장과 중앙일보 회장 등을 지낸 홍진기씨의 맏딸 홍라희씨(전 리움미술관장)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로 첫 공식 직함을 얻었다.

이병철 회장의 후계자는 장남 이맹희씨로 예상됐지만 1966년 사카린 밀수 사태와 관련해 연루 의혹을 받던 이맹희씨가 후계 경쟁에서 탈락했다.

1979년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공식 후계자로 공표했고, 이건희 회장은 9년간 부회장 직함으로 경영수업을 받았다. 1987년 11월20일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면서 이건희 회장은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공식 취임했다. 이후 5년간 그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 글로벌 삼성 신화의 시작, 반도체

부친 설득해 반도체업 진출
일본 주춤할 때 투자 더 늘려

이건희 회장은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등이 핵심 사업이던 이병철 회장 시절의 삼성을 전자 및 금융 계열로 재편했다. 1974년 경영난으로 부도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이 계기다. 국내외에서 “기술도, 자본도, 시장도 없는 한국에 반도체는 어불성설”이라는 ‘3불가론’이 팽배했지만 “언제까지나 기술 식민지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반도체’의 가능성을 봤다. 결국 회삿돈이 아닌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절반을 인수했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한국반도체의 기술 수준은 형편없었고, 상황은 악화됐다. 부회장 시절 거의 매주 서울과 일본, 미국 실리콘밸리를 오가며 전문가들에게 매달렸다. 반도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감으로 이병철 회장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병철 회장은 1982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4년 뒤인 1986년 7월 삼성전자는 1메가 D램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삼성 반도체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일본 업체들이 반도체 투자에 주춤한 틈을 타 투자를 늘렸다. 선두주자들과 반대로 불황에 투자를 늘리라는 그의 지시는 고비마다 주효했다. 1992년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D램 시장에서 1위에 올랐고, 그 자리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 “마누라,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

신경영 선언 ‘글로벌 일류’로
삼성자동차 뼈아픈 실패도
휴대전화 ‘디지털 전환’ 성공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 호텔. 이건희 회장과 임직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삼성전자 세탁기 조립 과정을 담은 영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상에는 크기가 맞지 않는 불량 뚜껑을 직원들이 칼로 깎아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취임 6년, 51세 젊은 회장의 격분이 서울로 전달됐다. 임원 200여명이 허겁지겁 프랑크푸르트로 집결했다. 호텔에 모인 임직원들에게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삼성을 글로벌 일류로 끌어올린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1997년 터진 외환위기로 삼성그룹도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구조조정이 끝날 무렵 삼성그룹 계열사는 65개에서 45개로 줄었다. 삼성전자 3만명을 포함, 5만명에 달하는 임직원이 그룹을 떠나야 했다. 특히 심혈을 기울인 삼성자동차의 실패는 뼈아팠다. 1998년 SM5 첫 제품이 출시됐지만 삼성차는 4조원의 부채를 남긴 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룹의 운명을 걸린 전환기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디지털’이었다. 1990년대 휴대전화 ‘애니콜’로 국내에서 성공신화를 쓴 삼성전자는 2010년 5월 첫 스마트폰 ‘갤럭시S’를 출시했고,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1위에 올라섰다.

■ 잇단 검찰과 특검 수사

특검 수사 등 기소, 경영 은퇴
올림픽 유치 위해 특별사면

이건희 회장은 경영권 편법 승계 문제와 비자금 조성, 무노조 경영 등으로 검찰과 특검 수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의 조사를 받았다. 2008년에는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가 폭로한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 조준웅 특검팀의 수사를 받았다. 특검은 경영권 편법 승계에 이용된 에버랜드 전환사채(CB)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배임),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이 회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 회장은 기소 직후인 2008년 4월 전략기획실 해체, 지배구조 개선 등이 포함된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재판 결과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관련 혐의엔 무죄가 선고됐으나 나머지에는 유죄가 인정돼 2009년 8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확정됐다. 하지만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재계와 체육계 등의 건의에 힘입어 유죄 확정 4개월 만에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단독 사면을 받았다. 이 회장은 3개월 뒤인 2010년 3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이 회장이 끝까지 고수했던 ‘무노조 경영 철학’도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반발을 불러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체제로 들어서며 삼성그룹에 노조가 설립되면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막을 내렸다.

이호준·구교형 기자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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