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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이동국 은퇴] 이동국, "40세 이상 출전 규정 있다면 더 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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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풋볼=전주] 이현호 기자 = 은퇴를 앞둔 이동국(41, 전북현대)이 유쾌하게 과거와 미래를 내다봤다.

한국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이동국이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난다. 26일에 은퇴 의사를 밝힌 그는 28일 전주월드컵경기장 기자회견장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23년 프로 커리어를 되돌아봤다.

이동국은 먼저 "오늘 이 자리에 백승권 단장님과 김상식 코치가 꽃다발까지 준비해주셔서 감사하다. 먼 곳에서 취재진분들께서 이 자리를 찾아주신 덕에 행복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분들이 부상 때문에 은퇴하냐고 물으신다. 몸상태는 완벽하다. 부상 때문에 은퇴하는 건 아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다. 장기 부상으로 인해서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부상이 있어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재활을 했다. 이번 부상은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남은 시간이 짧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사소한 것들에 서운해 했다. 몸이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정신이 나약해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진지하게 은퇴에 대한 생각을 올해 많이 했다.

-오랜 시간 은퇴를 고민했다고 했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은퇴 결심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부상 이후 나약해진 제 모습 때문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만 했는데 나이가 든 후에 부상으로 조급해하는 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운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2의 삶이 기다리기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젠 그만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울산전 전에 구단 분들에게 다 얘기를 드렸다. 울산전이 중요했기 때문에 발표 시기는 경기 다음으로 미뤘다. 울산전 다음날 발표하게 됐다.

-지금 어떤 느낌인가.

만감이 교차한다. 서운함도 있고 기대되는 것도 있다. 주위에서 '1년 더 해도 될 것 같다. 아직 경쟁력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해줬다.

-자신의 최고의 순간을 5가지만 꼽는다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5가지?

글쎄요. 몇 가지를 꼽는다고 하면 프로유니폼을 처음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포항에서 고등학생인 저에게 제 이름이 마킹된 33번 유니폼을 줬을 때 가장 기억난다. 그걸 며칠 동안 입고 잤던 기억이 있다. 너무 좋았던 순간이다. 당장 생각나는 건 2009년 전북에 와서 첫 K리그 우승했을 때가 가장 화려한 시간이었다.

힘들었던 시간은 2002년 월드컵 뛰지 못했을 때다. 항상 그때를 기억하면서 살기 때문에 늦게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02년 월드컵은 잊지 못할 기억이다. 2006년도에 독일 월드컵 2달 남기고 다쳤을 때 힘들었다. 모든 걸 다 걸고 준비했지만 부상으로 인해서 경기를 뛰지 못했다는 게 아쉽다.

-수많은 골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은?

한 골 한 골 모두 소중하다. 많은 분들이 생각해주시는 골이 있다. 김상식 코치와 함께 뛰었던 경기다. 독일전에서 발리슛으로 골을 넣었던 게 가장 기억난다. 공이 발에 맞는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최강희 감독에게 하고싶은 말은?

은퇴를 할 때 쓸쓸히 떠나가는 선수가 많았다.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만들어주신 분이다. 2006년에 전북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 뒤로 저와 같이 전북 역사를 일궈냈다. 제가 모르는 저의 기량을 끌어내주신 분이다. 평생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30대 중반부터 은퇴 이야기가 나왔는데, 본인을 잡아준 원동력은?

선수들 단체 메신저방에 은퇴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매년 후배들에게 '올해가 마지막 시즌이다'라고 말했다. 후배들은 '현실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멀리 내다보지 않고 바로 앞만 보면서 달려왔기에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노장이더라도 앞에 서서 선수들과 함께 파이팅하다 보니까 현재까지 왔다. 지금도 제 나이를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나이를 잘 모르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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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도 있었는데

저보다 더 큰 좌절감을 느낀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고 살았다. 힘들 때마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

프로는 선후배 관계를 떠나서 동료들과의 경쟁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장점을 다른 사람들이 못 따라올 정도의 장점으로 만들다보면 롱런할 수 있다. 후배들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다.

-많은 기록을 세웠다. 함께 뛴 선수 덕에 가능한 것 같다. 최고의 파트너는?

너무 힘든 질문이다. 23년 동안 같이 했던 선수들이 너무 많았다. 베스트 일레븐을 꼽는 건 고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김상식 코치도 여기 계시지만 2000년에 처음 만나서 많은 얘기를 해줬다. 2009년에 같이 전북에 와서 많은 걸 보고 배우고 있다. 김상식 코치 이름은 꼭 들어가야 할 것 같다. 2009년도 멤버들이 가장 생각 많이 난다. 에닝요, 루이스, 최태욱이 있다. 전북이 우승할 수 있도록 모두 똘똘 뭉쳐서 좋은 경기를 많이 했다. 그때 멤버가 가장 강한 공격진이었다.

-전주라는 도시가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제 고향인 포항을 가면 내비게이션을 켜고 다닌다. 전주에서는 내비게이션 없이 다닌다. 제2의 고향과 같다. 전주에서 얻은 게 너무 많다. 전중서 10년 넘게 운동을 하면서 팬들의 함성을 보면 저를 어렵게 대하지 않는다. 저를 친숙하게 생각해준다. 묘한 매력이 있다. 전주는 언제나 제 가슴 속에 제2의 고향으로 남을 것이다.

-선수 마지막 경기가 중요한 경기다. 유종의 미. 각오.

K리그1 우승을 하기 위해서 최대한 승점을 가져와야 한다.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컵을 들고 내려올 수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너무 기대된다. 보통 보면 은퇴할 때 선수들이 울더라. 울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기뻐서 우는 거라면 얼마든지 울 수 있다. 화려하게 동료선수들과 마무리하고 싶다.

-FA컵, AFC 챔피언스리그가 남아있다. 출전 여부에 대해.

공식적인 마지막 경기는 K리그 대구전에 맞춰있다. 다음달 지도자 연수가 있다. FA컵 결승 1차전은 어려울 것 같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지.

1998년 IMF 시절에 포항에 입단했다. 해외 전지훈련을 처음 가보고 싶었는데 국내에서 전지훈련했다. 공교롭게도 은퇴 시기가 코로나 시기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시기에 은퇴하게 됐다. 정리해보자면 1998 월드컵에 한국축구의 큰 이슈가 돼서 화려하게 등장한 것 같다. 하루하루가 너무 기뻤다. 2000년도 독일 브레멘에 진출해서 성공은 못했어도 도전할 수 있었다는 게 기억난다. 2002 월드컵에 무조건 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다시 한 번 일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2003년 군입대 이후 정신 무장을 해서 나왔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006 월드컵만 바라보고 준비했다. 다시 하라면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2006년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때 제가 뛰었다면 어떤 경기를 보여줬을까 생각한다. 이후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하고 1~2년 준비한 뒤에 해외에 진출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성남에서의 기억은 많지 않다. 그 후에 전북현대라는 팀을 만나서 2009년부터 ACL 포함 8개 트로피를 들었다. 전북에서 아주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등번호 20번. 어떤 후배에게 물려주고 싶은지.

저도 포항에 입단할 때 홍명보 선수가 입었던 20번 등번호를 받았다. 20번을 달고 뛰는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다. 아직까지 믿겨지지 않는다. 선수들 중에서 최보경 선수가 20번을 탐내더라. 네가 20번을 달면 욕 많이 먹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제 번호가 축구를 시작하는 선수들에게 갖고 싶어 하는 번호가 됐다는 걸 기쁘게 생각한다. 전북의 20번은 전북에서 키우고 있는 선수가 입었으면 한다.

-내년 계획은.

아직 내년 계획은 세우고 있지 않다. 내년에는 조금 쉬면서 무얼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시간으로 보내겠다.

-가족에게 하고픈 말은.

제가 은퇴를 해서 좋아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저는 안티팬조차 제 팬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땀을 흘렸다. 마지막 한 경기 남았다. 축구선수 이동국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그동안 고생했다는 마음으로 박수 쳐주시길 바란다. 어제 늦게 까지 부모님과 얘기하면서 가슴이 찡했다. (눈물) 안 울려고 했는데... 부모님께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좋아하더라. 아빠와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아이들은 좋아했다. 아이들과 함께 쉬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같이 보고 싶다.

-앞으로 전북의 간판 스타는?

전북 생각하면 떠오르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이재성, 김민재 정도의 선수들이 나와줘야 한다. 현재 그럴만한 선수들이 많다. 전북은 특정 선수보다 원팀으로 강한 팀이다.

-지도자 준비는?

지도자 준비를 하고 있지만 당장 지도자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특별히 무얼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선수들이 무얼 잘할지 생각한다. 제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없다.

-불멸의 기록들을 많이 세웠다. 깰 후배가 나올까.

기록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제가 세운 기록들을 다시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프로팀, 대표팀 포함해 800경기 이상 출전했다는 건 1, 2년 잘해서 쓸 수 없는 기록이다. 10년 이상 꾸준하게 잘했기에 가능했다. 그 기록은 후배들도 깨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앞에 세워진 축구공들은 이동국 선수에게 의미있는 순간의 공이다.

이 모든 기록은 저 혼자 이룬 게 아니다. 동료 선수들에게 감사하다. 전북에서 200골을 넣었던 공이 가장 최근이어서 기억이 난다. 한 팀에서 200골을 넣긴 쉽지 않다. 전북 200호골 공이 가장 기억에 난다.

-유럽 진출을 섣부르게 도전했다고 했는데

이랬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은 한다. 십자인대 수술하고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유럽으로 갔다. 섣불렀다. 2005년, 2006년 몸상태를 유지한 채 도전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도전할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꿈을 갖고 도전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시기만 조금 늦춰서 최고의 몸상태로 유럽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다. 예전보다 지금의 생활이 편해졌다. 외국에서 한국으로 전화할 때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된다. 지금 외국에서 뛰는 선수들은 예전보다 쉬울 거라 생각한다. 그 당시 저는 전화카드 사서 집에 전화할 때였다. 물론 저보다 차범근 선배님 시절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선수들에게 좋은 환경이다.

-스트라이커가 잘 안나온다.

스트라이커가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외국인 선수와의 경쟁에서 이겨내야 한다. 예전에는 선수들의 희망포지션에서 스트라이커가 1순위였다. 지금은 사이드 윙어가 1순위다. 팀에서 출전 시간을 보장해주면서 선수를 키워야 한다. 저도 실력보다 많은 기회를 받았다. 지금 22세룰을 통해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앞으로 5년 안에 대형 스트라이커가 나올 것이다. 오버 40세 룰이 나오면 더 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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