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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일문일답]이동국 "축구 인생 최고의 골은 독일전 발리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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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프랑스월드컵서 신데렐라로 등장

월드컵마다 '불운의 아이콘'으로

2009년 전북 현대 입단 후 K리그 7회·ACL 1회 우승

최고의 순간 2009년 전북 우승·최악의 순간 2002 월드컵 제외

내달 1일 최종전서 은퇴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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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 이동국(41·전북)이 은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전북 현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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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뉴시스] 안경남 기자 = 23년 축구 인생에 마침표를 찍은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이동국(41·전북)이 몸보다 정신적으로 약해진 자신의 모습에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동국은 28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많은 분이 부상으로 그만둔다고 짐작하고 물어보셨는데, 몸 상태는 회복해서 경기에 뛸 수 있는 아주 좋은 상태다. 부상 때문에 그만두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번 무릎 부상으로 조급해하는 저 자신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며 “몸이 아픈 건 참을 수 있어도 정신이 약해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다"라고 설명했다.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프로 데뷔한 이동국은 광주 상무, 성남 일화를 거쳐 2009년 전북 현대에 입단해 지금까지 K리그 통산 547경기 228골 77도움을 기록했다. 전북 소속으로는 360경기 164골 48도움이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에서도 75경기에서 37골로 이 대회 최다골 보유자다.

특히 이동국은 전북에서 K리그 우승 7회, ACL 우승 1회 등을 차지하며 '제2의 전성기'를 보냈다.

국가대표로도 이동국은 화려한 족적을 남겼다. 1998년 혜성 같이 등장해 당시 차범근 전 감독이 이끌던 프랑스월드컵 대표팀에 깜짝 발탁돼 모두를 놀라게 했다.

벤치만 지킬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이동국은 프랑스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 네덜란드와 경기에 출전해 한국 최연소 월드컵 출전 기록을 작성했다. 그의 나이 만19세2개월로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의 폭격에 한국은 0-5 완패를 당했지만, 후반 교체로 나간 이동국은 세계적인 수비수들을 상대로 강력한 중거리 슛을 시도하는 등 당찬 모습으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동국이 꽃길만 걸은 건 아니다. 2002년 자국에서 열린 한일월드컵에선 선수 생활의 첫 시련을 겪었다. 거스 히딩크 대표팀 감독은 이동국의 수비 가담 능력을 지적하며 그를 최종 명단에서 제외됐다.

월드컵 악연은 4년 뒤인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계속됐다. K리그 무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이동국은 월드컵을 목전에 두고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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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세 이동국이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을 통해 혜성 같이 등장했다. (제공=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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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에서도 대회 전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우루과이와 16강전에 교체로 나와 경기 막판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으나 슈팅이 발등에 제대로 얹히지 못했다.

'음주 파동'도 이동국 축구 인생 옥에 티로 남아있다. 2007년 아시안컵에서 물의로 1년간 대표선수 자격이 정지되는 중징계를 받았다.

또 그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미들즈브러에 입단하며 2001년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에 이어 두 번째 유럽 도전에 나섰지만, 적응 실패로 1년 만에 짐을 쌌다.

이동국은 프로 무대와 대표팀에서 뛰며 총 844경기에 출전해 한국 선수 역대 최다인 344골을 넣었다.

그는 "한 골 한 골이 다 소중하지만, (2004년) 독일전 발리슛을 했을 때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공이 발에 맞는 찰나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라고 말했다. 2004년 12월 부산에서 열린 독일과 평가전에서 이동국은 당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올리버 칸을 상대로 환상적인 발리슛을 성공했다.

◇다음은 이동국과의 일문일답

-은퇴 소감은.

"많은 분이 부상으로 그만둔다고 물어보셨는데, 몸 상태는 회복돼서 경기에 뛸 수 있는 상태다. 부상 때문에 그만두는 건 아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무릎 부상으로 조급해하는 자신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예전엔 부상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재활하면서 최고의 몸으로 돌아왔는데 이번 부상 땐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렇다 보니 정상이 아닌데 욕심을 내고 경기에 들어갔다. 스스로 불안했고 사소한 것에 서운해하면서 은퇴에 대해 생각을 했다. 몸이 아픈 건 참을 수 있어도 정신이 나약해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은퇴를 고민하고 결심했다"

-은퇴를 결심한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면.

"부상 때 나약해진 저의 모습을 발견한 뒤였다. 가족들과 얘기를 나눴다. 항상 긍정적으로 좋은 생각만 했는데, 나이가 든 후에 부상을 당하고 조급해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더는 운동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와이프와 얘길했고, 그만해도 될 때가 돼서 은퇴를 결심했다. 지난 울산 현대와 경기 전에 구단, 감독, 코치진과 얘기를 나눴다. 울산전 중요해서 경기가 지나고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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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98년 AFC 청소년대회 시상식에서 득점왕을 수상하고 있는 이동국. (사진=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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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솔직한 심정은.

"만감이 교차한다. 서운한 마음도 있고, 기대되는 마음도 있다. 많은 분이 전화로 1년 더 해도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래도 저 자신이 경쟁력 있는 상태에서 그만두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 있다면.

"가장 기억나는 순간을 꼽자면, 프로 유니폼을 처음 받았을 때다. 포항에서 등번호 33번 유니폼을 고등학생인 저에게 줬다.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을 선물로 받고 며칠 동안 입고 잤던 기억이 난다. 또 2009년 전북에 와서 첫 우승컵을 들었을 때가 축구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간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뛰지 못했을 때다. 그때 심정을 기억하면서 살다보니, 지금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리고 2006년 독일월드컵을 두 달 앞두고 다쳤을 때도 최악의 순간이었다. 2002년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준비를 했는데 부상으로 뛰지 못했다. 경기력적으론 가장 완벽한 해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은.

"한 골 한 골이 모두 소중하다. 많은 분이 생각해주시는 게 2004년 독일전 발리슛이다. 그때가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공이 발에 맞는 순간과 임팩트, 찰나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최강희 전 감독과는 전북에서 9년간 호흡을 맞췄다. 이동국에겐 어떤 존재인가.

"은퇴할 때 쓸쓸히 떠나는 선수들이 많은데, 이렇게 많은 분 앞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할 수 있게 해준 분이다. 2009년 전북에 입단하면서 전북이란 팀을 갈이 일궈냈다. 감독님은 저도 모르던 기량을 다시 끄집어내 주셨다. 이동국을 다시 인정받게 해준 분이다. 평생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30대 중반 이후 항상 은퇴 얘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자신을 잡아준 것은.

"이번에도 선수들 단체 메신저에서 은퇴한다고 말하니까 믿질 않았다. 최근 5~6년 정도 후배들한테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현실이 될 줄 몰랐다고 하더라. 롱런한 비결은 멀리 보지 않고 당장 앞 경기만 보고 지내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노장이니까 못한다는 생각보다 파이팅해서 하다 보니까 나이를 잊고 살았다. 그게 원동력 같다. 저도 제 나이를 들으면 깜짝깜짝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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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2004년 독일과의 친선경기에서 득점 후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이동국. (사진=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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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을 극복한 위대한 선수다.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을 부탁한다.

"저도 좌절하고 힘들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저보다 더 큰 좌절을 겪는 사람을 생각했다. 이만큼 좌절은 더 큰 좌절을 가진 사람보다 행복하단 생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왔다. 그렇다 보니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았다"

-축구 전설로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한다면.

"프로 선수란 직업은 선후배를 떠나서 동료와 경쟁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게 프로에서 오래가는 비결이다. 그러려면 단점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장점을 상대가 못 따라오게 만들면 프로에서 롱런할 수 있다"

-이동국이 함께했던 최고의 축구 파트너는.

"23년 동안 함께 한 선수들이 너무 많다. 베스트11을 뽑는 건 한참 고민해야 한다. 여기 김상식 코치도 있지만, 2000년도에 만나 2009년 전북에 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에닝요, 루이스 등 2009년 전북 멤버들이 가장 생각이 난다. 그때가 가장 강했다"

-전북에서 오랜 선수 생활을 했다. 전주란 도시가 갖는 의미는.

"지금 고향 포항에 가면 길 안내를 켜고 다니는데, 전주에선 그냥 다닌다. 그만큼 저에겐 제2의 고향이다. 전북에서 얻는 게 너무 많다. 여기서 10년 넘게 운동하면서 전주 팬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았다. 전북 팬들은 친숙하고 끈끈한 묘한 매력이 있다. 은퇴하지만, 전주는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자주 올 것 같다"

-내달 1일 대구FC와 최종전에서 은퇴를 치른다.

"우승하기 위해 승점을 가져와야 한다.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컵을 들 수 있다면 그야말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너무 기대된다. 은퇴할 때 선수들이 많이 울던데 기쁨의 눈물이라면 얼마든지 울 수 있다. 마지막 트로피를 들도록 준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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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2015년 현대오일뱅크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클래식 MVP를 수상한 이동국. (사진=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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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컵 결승과 AFC 챔스 일정이 남았는데.

"공식 은퇴 경기는 대구전이 될 것이다. 다음날 지도자 코스를 가야 한다. FA컵 2차전은 홈이지만, 코치진과 의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23년 축구 인생을 보냈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지.

"1998년 IMF때 입단해서 해외 전지훈련을 처음하고 싶어 여권을 만들었는데 국내 전지훈련을 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은퇴를 결정해 아이러니하다. 1998년 월드컵에 이슈가 돼 화려하게 등장했고 그때 기억이 남아있다. 2000년도엔 독일 브레멘에 진출해 성공 못 했지만 도전한 것에 의미가 있었다. 2002년 월드컵엔 무조건 있을 거라 생각한 이동국이 없어 스스로 실망했고 다시 일어날 시간을 가졌다. 2003년 입대 후 다시 한번 정신적으로 무장을 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만 보고 뛰었다. 다시 하라면 못할 정도로 땀을 쏟았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솔직히 월드컵에 나갔다면 어떤 경기력을 보여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수술하고 1~2년 뛰고 2007년 EPL에 나갔다면 하는 생각도 든다. 조금 섣부른 결정이기도 했다. 성남에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다. 2009년 전북을 만나서 ACL을 포함해 8개 트로피를 들었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등번호 20번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선수가 있나.

"포항 입단할 때 홍명보 선수가 입었던 20번을 달고 지금까지 뛰었다. 다가올 경기가 20번을 달고 뛰는 마지막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선수들 중엔 최보경이 탐을 내던데, 다는 순간 욕먹을 거라고 말해줬다(웃음). 제 번호는 전북이 키우고, 유스로 성장하는 선수 중에 가능성 있는 선수가 입었으면 한다"

-은퇴 후 내년 계획은 무엇인가.

"앞의 경기만 생각하고 있다. 아직 내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은퇴 이후에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할지,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찾아야 할 것 같다. 쉬면서 어떤 게 축구 외에 잘 할 수 있는 일인지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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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 이동국(41·전북)이 은퇴 기자회견에서 백승권 단장에게 꽃다발을 받고 있다. (사진=전북 현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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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축구인생을 함께한 가족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은퇴 소식을 듣고 많은 분이 서운해하고 메시지와 전화를 주셨다. 감사하다. 은퇴하면서 좋아하는 팬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안티 팬도 제 팬으로 만들겠단 생각으로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 본인도 은퇴해야겠다고 하시더라(눈물). 프로 생활은 23년이었지만 축구 시작부터 뒷바라지를 32년 넘게 해주셨다. 아버지도 은퇴하겠단 말씀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 안 울려고 했는데 부모님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 그동안 고생하셨고, 은퇴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이들은 좋아한다. 아빠가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제 아이들이 커 가는 모습을 같이 보고 싶다"

-미래의 전북을 이끌 선수가 있다면.

"전북하면 떠오르는 선수가 필요하다. 전북에서 찾아야한다. 구단과 코치진의 몫이다. 이재성, 김민재 정도 선수가 나와야 한다. 충분히 그럴 능력 있는 선수들이 많다. 하지만 전북은 특정 선수보다 단체로 모였을 때 강한 팀이다. 선수를 찾기보다 원 팀으로 가도 좋을 것 같다"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다. 어떤 지도자로 돌아오고 싶나.

"지도자 코스를 하고 있지만, 당장 지도자를 해야겠단 생각은 없다. 쉬면서 생각해보겠지만, 지도자라고 해서 특별히 뭔가 해야겠단 것보다 선수들이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는 게 지도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가장 애착이 가는 기록은 무엇인가.

"저도 며칠 동안 기사를 검색하면서 많은 걸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뛸 때는 몰랐는데 은퇴할 때 돌이켜보니 많은 기록이 있었다. 선수로 대표팀을 포함해 800경기 이상을 뛰었다는 걸 알았다. 한 선수가 800경기 이상 뛸 수 있다는 건 1~2년 잘해서 될 수 없다. 10년 이상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걸 위해 몸을 만들고 좋은 경기력으로 뛰었다는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마 후배들도 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기념공이 있다. 이 중에 하나만 선택한다면.

"은퇴할 때 마지막 발에 맞는 공이 기억이 날 것 같다. 모든 게 나 혼자 이뤄낸 게 아니다. 동료들에게 항상 감사하다. 전북에서 200골을 넣었을 때가 가장 최근이다. 그래서 기억이 난다. 한 팀에서 200골을 넣는 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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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라이언킹' 이동국(41·전북)이 은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전북 현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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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럽에 갔다면, 성공했을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있나.

"23년 축구 인생을 정리하면서 그 부분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한다. 사실 최고의 몸 상태로 나가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십자인대 수술을 하고 한 경기도 풀타임을 뛰지 않고 EPL에 나간 게 아쉽다. 좀 더 좋은 몸을 유지했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가 나왔을거란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다시 도전할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꿈을 가지고 도전해보라고 얘기한다. 지금은 유럽에서 생활이 예전보다 편하다. 핸드폰 하나면 전화를 할 수 있고 취미 생활도 가능하다. 그땐 전화 카드를 사서 전화할 때다. 그래서 적응이 힘들었다. 해외 진출을 꿈꾸는 선수들에게 지금은 너무 좋은 환경이다.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

-2017년에도 대표팀에 뽑힌 바 있다. 이동국 이후 전통 스트라이커가 없는데.

"K리그와 아시아리그에서 스트라이커로 살아남기 어렵다. 모든 팀이 외국인 공격수를 선호하고, 이는 성적과 연관돼 있다. 지금은 22세 이하(U-22) 룰로 어린 선수들이 뛸 수 있지만, 외국인 선수와 경쟁을 이겨야 가능하다. 예전엔 스트라이커가 1순위였다면 지금은 윙어나 미드필더로 시작하는 선수들이 많다. 그런 부분이 안타깝다. 구단에선 좋은 스트라이커를 만들기 위해 출전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 저도 실력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 성장하면서 외국인 선수와 경쟁하는 힘이 생겼다. 저도 오버 40세 룰이 나오면 더 뛸 생각이 있다(웃음)"

-아내에게 한마디 한다면.

"부상 이후 많은 얘길 나눴다. 옆에서 와이프가 조급해지고 나약해진 저의 모습을 이야기해줬고,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다. 마무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 그게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짜준 것처럼 흘러가고 있다.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하고 은퇴하는 선수가 몇이나 되겠나.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축구 인생의 마지막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응원해준 주변과 팬들에게 한 마디.

"축구를 시작하면서 많은 은사님을 만났다. 모두 말할 수 없지만, 축구 선수 이동국을 성장시켜준 감독님들께 감사하다. 축구선수 이동국이란 타이틀을 더 쓸 수 없어 아쉽다. 솔직히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응원해준 팬 여러분에게도 감사하다. 과분한 사랑을 주셨다. 마지막 1경기도 응원해주시고, 마지막까지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가 되겠다"

☞공감언론 뉴시스 knan90@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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