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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임신중지 금지하자 ‘철제 옷걸이’로 맞선 폴란드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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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기형태아 임신중지’ 위헌 결정

수만명 “중세로 되돌리려는가” 엿새째 시위

의회서 임신중지 요건 강화 어렵자

사법부 통해 강행한 정부 비판 확산


한겨레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의회 앞에서 27일(현지시각) 여성들이 도로에 앉아 지난 22일 이뤄진 헌법재판소의 사실상 임신중지 전면 금지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바르샤바/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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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헌법재판소가 임신중지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결정을 내린 뒤 시작된 반발 시위가 나날이 격화하고 있다. 극우 정권이 의회를 패싱하고 고분고분한 사법부를 통해 민의에 어긋나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불만이 고조되면서, 반정부 시위로 확대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조처에 따른 집회 제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한 헌법재판소 판결에 항의하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27일(현지시각) 폴란드의 주요 도로와 다리 등을 막고 반정부 시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지난 22일 폴란드 헌재가 “기형 태아를 선별해 임신중지를 하는 것은 나치의 우생학과 다를 게 없다”며 기형 태아에 대한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률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이후 시작된 시위가 엿새째 이어지며 더욱 격화되는 모양새다.

시위대는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여성을 오직 자궁이라는 생식 기관을 가진 도구로만 보고 폭력적으로 억압한다는 내용을 다룬 소설 <시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분장을 하거나 ‘철제 옷걸이’를 들고 거리로 몰려 나와 “폴란드를 중세로 되돌리려는 야만적인 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철제 옷걸이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자가 임신중지의 상징으로 통한다.

특히 지난 25일에는 시위대가 예배 중인 성당으로 쳐들어가 “이제 전쟁이다” 등 구호를 외치고, 벽에 ‘여성들의 지옥’이란 낙서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수도 바르샤바 근교에선 교황 바오로 2세의 동상에 빨간 페인트가 뿌려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을 지키겠다고 출동한 극우단체 회원들과 시위대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면, 시위대와의 대치 과정에서 경찰이 최루가스를 뿌리기도 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은 전했다.

국민 95% 가량이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에서 시위대가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교회까지 시위대의 타깃이 된 것은, 헌재의 이번 결정이 사실상 여성들의 임신중지 권한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임신중지 요건을 완화해온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1993년 성폭행과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경우와 임신부의 건강에 문제가 있을 경우, 태아에게 장애가 있을 때에 한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을 더욱 강화했다. 특히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폴란드에서 시행된 임신중지 수술 1100건 중 1074건이 기형 태아와 관련된 것이었다. 가뜩이나 종교적 이유로 의사들이 수술을 기피하는 데다 대기시간이 길어,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해외 원정·불법 수술을 택해왔는데, 이번에 헌재 결정으로 사실상 임신중지를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헌재의 결정이 시위를 촉발하긴 했으나, 날이 갈수록 집권 ‘법과 정의당’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번져가고 있다. 여론에 반대에 부닥쳐 의회에서 임신중지 요건을 강화하는 입법 추진이 실패하자, 법원을 통해 이를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또 일각에선 안드레 두다 대통령까지 확진 판정을 받는 등 최근 코로나19 사태에 정부가 부실 대응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쏠리는 걸 막기 위해 여성들을 저당잡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런 반발이 고조되면서, 임신중지 금지 반대 시위는 지역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며, 여성단체들이 택시기사나 농부, 탄광 노동자 등으로부터 전에 없는 지지를 받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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