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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유명희 구하기'가 국제사회 비난 받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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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후보 자질 문제삼았지만
中 견제·자유무역 근간 흔들기가 본심
진퇴양난 한국... 사퇴도 버티기도 난망
한국일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 최종 라운드에 진출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6일 스위스 제네바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제네바 주재 각국 대사들을 초청해 개최한 리셉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제네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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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사무총장으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을 떠나 지지 후보를 공개하지 않는 관례와 다자주의 협의 원칙을 깨고 다수 회원국들의 후보 추대에 반기를 든 것이다. 표면적으론 나이지리아 후보의 자질 부족을 반대 사유로 들었지만, 사실상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투영된 일방주의로 받아들여지면서 대내외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28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미국은 WTO 다음 사무총장으로 한국의 유명희 본부장이 선출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USTR은 “유 본부장은 성공적인 통상 협상가와 무역정책 입안자로서 25년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진정한 통상 전문가”라며 “이 조직의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량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또 “WTO는 중대한 개혁이 매우 필요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직접 경험을 쌓은 사람이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미국은 이날 열린 WTO 전체 회원국 대사급 회의 중 선호도 조사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인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나이지리아 후보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통상분야 경험이 부족해 총장직에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다. ‘고해(Confession)’로 불릴 만큼 비밀주의가 특성인 WTO 총장 선출 절차가 진행되는 와중에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비토한 건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선호도 조사에서 패한 후보는 자진 사퇴하고, 회원국간 협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총장을 세우는 게 WTO의 관례였다. 그러나 미국의 돌발 행동으로 차기 사무총장 선임은 내달 9일 회의까지 다시 안갯속 형국으로 빠져들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회원국 대사는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에 “투표로 가면 나이지리아 후보의 승리 가능성이 99%”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희 구하기’ 배경에는 중국 견제 의도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이 지지하는 후보에 타격을 주고, 향후 중국 인사의 WTO 고위직 입성을 막으려 같은 동아시아권인 한국 후보를 미는 것이란 시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임기 내내 “편향적인 WTO가 경제대국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해 각종 특혜를 준다"는 주장을 펴왔다. 미국의 노골적인 개혁 요구와 탈퇴 압박은 전임 호베르투 아제베두 총장이 조기 사임한 주요 원인으로도 꼽힌다.

유럽에선 미국이 또다시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국제기구와 자유무역 질서를 흔들려 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중국은 물론 동맹국에까지 관세 폭탄을 일삼아온 트럼프 행정부는 상소기구 위원 선임을 막는 방식으로 이미 WTO 분쟁 해결 기능도 마비시켰다. 이번 사태는 WTO 수장 공백사태를 짧게는 수 주, 길게는 수 개월 연장시킬 전망이다. 결국 투표로 차기 총장이 선임되더라도 모든 회원국 지지를 얻지 못한 수장은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미 상무부 고위직 출신인 윌리엄 라인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은 미국의 반대가 “매우 트럼프적(Very Trumpian)”이라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고춧가루를 뿌리겠다는 태도라 WTO 내부 갈등이 깊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의 지원으로 유 본부장은 다시 한 번 역전극을 꿈 꿀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는 물론, 유럽연합(EU)과 중국, 일본 등 대다수 회원국이 한국을 지지하지 않고 있어 판세가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영국 BBC방송은 이날 “전체 164개 회원국 가운데 과반이 넘는 104개국이 나이지리아 후보를 지지했고 유 본부장 지지는 60표에 그쳤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국 입장에선 미 행정부가 공개ㆍ공식적인 방법으로 힘을 실어준 상황에서 사퇴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국제사회의 눈총을 견디며 버티기도 만만치 않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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