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쓰러지지 않는 탈북 여사장, 밤마다 韓사장들 접대요구에…[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아일보

신경순 신영무역 대표가 중국 거래업체를 방문해 밤알을 살피고 있다. 신영무역을 만든 초기인 9년 전 사진이다. 신경순 대표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 안에서 한 여인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입사한 회사는 6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사장은 사채업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이라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서울에 오면 200~300만 원은 거뜬히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올라왔지만, 알고 보니 마사지업소였다.

이제 더 헤맬 기력도 없었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여인은 결심을 굳혔다.

“부도 난 저 회사를 내가 인수하자.”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그는 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선언했다.

“이 회사 제가 맡아 살리면 어떨까요?”

남자 상무(고작 직원이 3명인 회사였지만)가 박수를 보냈다.

“그래,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듣기 좋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말에 힘이 솟았다.

‘그것 봐. 이들도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나는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하지. 어차피 가진 것 없는 몸인데, 한번 힘껏 부딪쳐 보기라도 하자.’

2009년 3월 한국 입국 7개월 차 탈북여성 신경순 씨에게 일어난 일이다. 망했던 회사는 신 씨가 인수한 2년 뒤 연간 매출을 20억 원을 넘겼다.

# 탈북

신 씨는 196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영예군인(전상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들처럼 학교를 다녔고, 1986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남들이 선망하는 39호실 산하 외화벌이회사에 취직했다. 대우도 좋았고, 가끔 양복지와 같은 선물도 받는 회사였다.

그러나 그는 노동당원이 되겠다고 그 회사를 2년 만에 때려치우고, 제일 힘든 곳인 무산광산 채굴 현장에 자원했다.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하지만 결국 얻은 것은 병이었다. 2년 만에 집에 돌아와 병 치료를 하는 도중 ‘고난의 행군’을 맞았다.

남들처럼 장사도 했고, 황해도를 오가며 쌀 배낭을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결국 1999년 탈북을 선택했다. 탈북한 뒤엔 중국 허베이(河北) 성의 깊은 산골 한족 남성에게 의탁해 살았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3718명(2020년 9월 기준) 여성은 72%이며, 탈북민 전체의 70%는 함경도 지역 출신이다. 신 씨의 성장과 탈북 스토리, 중국 생활은 많은 탈북 여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음식도 안 맞는 곳에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아픔을 여기에 다 설명할 순 없다.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2년 뒤 파출소를 찾아가 북에 보내달라고 해도 무시하는 동네였다. 그가 살았던 농촌은 밤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밤을 줍고, 팔고 하는 생활이 1년 내내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그래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중국어부터 배워야 한다.”

그 마을 여인들은 모두 문맹자였다. 남자들도 신문을 잘 읽을 줄 몰랐다.

신 씨는 한 학년 올라가며 아이들이 버린 흙 묻은 교과서를 주어다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독학했더니 이제는 중국인도 가려보지 못할 정도로 말과 글이 능숙해졌다. 이젠 어딜 가든 취직이 가능할 것 같았다.

2005년 그는 집을 나와 현에 있는 옷 공장에 취직했다. 한국어는 어디서 들을 곳도 없는 곳에서 그는 한족 여인들과 함께 공장에 다녔다.

# “북송하세요.”

삶을 바꾼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어느 날 옷 공장 옆에 있는 농산물수출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한국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는데 일을 처리해주던 조선족 통역이 그날 없었던 것이다. 그곳 사장은 옆 옷 공장에 조선에서 온 여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신 씨는 처음 한국 사람과 통화하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분명 우리말인데, 제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순간 내가 중국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렇게 급할 때마다 통역 몇 번씩 해준 것이 인연이 돼 한국 거래처 사장이 왔을 때도 통역을 해주게 됐다. 마침 한국 사장은 중간에서 낀 조선족 통역이 사기를 치는 것 아닌지 의심하던 차였다. 그는 신 씨를 무역 거래 회의에 참가시켰다. 처음엔 가만히 앉아 들으라고 했다. 이 회의에 참가하면서 신 씨는 농산물 거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하게 됐다.

한국에 돌아간 사장은 곧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자기가 월급을 줄 테니 허베이 성의 2~3개 현을 담당해 밤 시장 현황과 가격 등을 조사해 보내라는 것이다.

그가 그 일을 시작하자 주변에서 “가격 좀 뻥튀기해도 한국에선 모른다. 이럴 때 돈 좀 벌어놓아야 한다.” “중국 사장들에게서 선물을 적당히 받아도 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신 씨는 자신을 믿어준 한국 사장이 고마워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단 1전도 붙이지 않고 정직하게 보고했고, 몇 개 현을 돌아다니며 자기 일처럼 가장 싸고 질 좋은 밤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2년을 일했다. 이제는 허베이 성의 중국 밤 수출 회사 사장들과도 안면도 트여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시련이 찾아왔다.

2007년 한 중국 사장이 보낸 밤이 계약서와 달리 질이 좋지 않아 클레임(손해배상)에 걸렸다. 중국 사장은 사과 대신에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화가 난 한국 사장은 “저 회사의 밤은 절대 받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해 가을 햇밤철이 다가오자 중국인 사장이 “왜 우리에겐 오더를 주지 않냐”며 찾아왔다. 신 씨가 상황을 설명하며 물량을 줄 수가 없다고 하자 그가 협박했다.

“우릴 포함시켜주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신고해 북송시킬거야.”

신 씨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한국 사장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다고 생각해 태연하게 대답했다.

“맘대로 하세요.”

그러고도 2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신고까지 할까 속으론 기대도 품었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났다. 공안이 그가 묵던 숙소에 들이닥쳐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 보위부 감옥에서

2007년 9월 6일 그는 단둥을 거쳐 평북 신의주 보위부로 끌려 나갔다. 북한에 도착한 그날부터 신 씨는 폭행과 수치심 등을 겪으며 후회했다.

“그래도 중국에 있으면 언젠가 고향 갈 기회가 있을 줄 알고 한국으로 가지 않았던 내가 정말 바보였구나.”

신 씨가 일할 당시 중국에선 드라마 ‘대장금’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드라마가 상영되는 시간엔 공장과 거리가 텅텅 비었다. 신 씨를 보고 동료들이 “한국이 그렇게 잘 사냐. 너는 왜 거길 가지 않냐”고 물었다. 그를 고용한 한국 사장이 한국에 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싫다고 대답했다.

북한에 끌려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나서야 신 씨는 정신이 들었다. 고향에 대한 미련이 날아가는 데는 단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 여길 나가 이번엔 한국에 가야겠다.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싹 차리면 살 길이 있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나 기회를 잡아야겠다.”

며칠 뒤 보위부 감옥 소장이 신 씨를 불렀다.

“이봐, 신경순. 너는 경력이 좀 특이하더라. 중국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다며?”

“예, 허베이 몇 개 현 농산물을 동남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거긴 무역을 어떻게 해?”

신 씨가 한국과 거래했다는 것만 쏙 빼고, 중국에서 이뤄지는 농산물 수출 절차 등을 설명하니 소장의 눈이 커졌다. 북한에선 달러나 위안화를 만질 수 있는 무역업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선망의 직업이다. 그런데 그런 무역업을 중국 본토에 앉아 세계와 했다고 하니 소장이 놀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돈 많이 벌었지? 얼마나 벌어놨어?”

“예, 몇 십만 달러는 벌었는데, 갑자기 잡혀왔습니다.”

“억울하겠다. 중국 남자 좋은 일만 했네.”

“소장님. 돈 버는 재간이 있으면 그 돈 내오는 재간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 씨의 말에 이번엔 소장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다음날 소장은 북송돼 감옥에 수감된 전체 탈북민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쳤다.

“너네 신경순이 절반만큼만 살고 오면 내 욕도 안한다. 바보처럼 돈도 못 벌고 그러고 잡혀오나.”

소장이 그렇게 소리치자 다른 간수들이 신 씨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보위부 감옥은 북송된 탈북민을 심문해 처형할 사람, 정치범수용소나 일반 감옥에 보낼 사람, 보안서(경찰) 집결소(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낼 사람 등으로 분류하는 곳이다. 집결소에 가면 가장 처벌이 경미하다. 그러나 그곳에도 빨리 보내진 않는다. 보통 감옥에서 이관되기까지 몇 달씩 걸리는데 경순은 한 달 만에 집결소로 넘겨졌다.

그가 나가는 날 소장의 측근이 그를 따로 불렀다.

“이봐, 경순이. 이제 네가 살아가려면 돈이 매우 필요할거야. 우린 전혀 소문내지 않고 중국에서 돈 받아오는 선이 있어. 집결소에서 나오면 찾아와.”

측근이 몰래 건네준 작은 쪽지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중국에서 무역을 했다는 신 씨의 서류가 넘어왔는지 집결소 간수(경찰)들도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힘든 야외 일을 시키지 않고 주로 집결소 마당에서 일하게 했다. 간수 한 명은 그의 옆에 붙어 중국어를 가르쳐달라 성가시게 했고, 한 명은 중국 생활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사장의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신 씨는 북한에서 글로벌 인재라도 북송된 듯이 인정된 것이다. 집결소에서도 한 달 정도 있은 뒤 그는 고향인 청진으로 송환됐다.

동아일보

신경순 대표가 한국에 입국했던 2008년 여름 하나원에서 남긴 사진. 신경순 대표 제공


# 한국 입국

고향에 갔더니 거주지 분주소는 전기도 없고 난방도 없었다. 밤에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가 왔다는 소식에 부모들이 찾아와 안면이 있는 보안원에게 사정했다.

보안원이 며칠 뒤 말했다.

“너는 노병의 딸이니 특별히 봐줘서 집에서 다니게 해줄게. 매일 아침 일찍 여기에 왔다가 조사를 받고 밤에 집에 가.”

엄청난 특혜였다. 신 씨는 일주일 뒤 도망쳤다.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숨어 다니다가 2008년 1월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에 가니 그를 알던 사장들이 동정해주며 빨리 한국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심지어 해외에 나간 여인의 호구까지 구해 진짜 중국인 여권까지 만들어주었다. 그해 5월 그는 중국 무역업자 일행에 포함돼 김해공항에 내렸다.

한국에 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주일 동안 부산 시내 등을 구경 다니다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더니 난리가 났다. 탈북민이 김해공항을 통해 들어온 첫 사례라고 들었다. 이후 그는 김해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와 정보기관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때까지만 해도 꿈은 하늘에 닿아있었다. 앞으로 나가 어떻게 살지 걱정하는 남들과는 달리 그는 사회에 나가 입사할 직장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가 중국에 있을 때 소속됐던 부산 거래처 사장이 자기에게 와서 함께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원을 나와 그는 망설임 없이 부산으로 갔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보람은 컸다. 월급은 100만 원에 불과했지만 이제 중국에 가서 계약을 체결할 때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하자마자 국제 금융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가 입사했을 때만해도 1달러에 1000원대였던 환율은 그해 12월 1500원을 넘어섰다. 수입업체들에게 직격탄이었다. 곳곳에서 기업들이 도산하기 시작했다. 사채를 쓰며 버티던 사장은 결국 이듬해 3월에 사라졌다.

회사가 사라진 뒤 신 씨는 직업을 찾았지만 40살이 된 여성을 찾는 기업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신 씨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신경순 대표가 2016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2회 동방경제포럼에 박근혜 대통령을 동행한 경제사절단에 뽑혀 갔을 때 찍은 사진. 신경순 대표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위기에서 찾은 기회

신 씨가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했을 때 수중에는 반년 동안 100만 원의 월급을 받아 모은 400만 원이 있었다. 그 돈으로 그는 공과금부터 갚았다. 소상공인 대출 1000만 원을 받고 5개월 뒤 탈북민에게 주는 취업 장려금 500만을 더해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주었다.

그리고 8월 24일 처음으로 ‘신영무역’이라는 회사 간판을 걸었다. 새롭게 뿌리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중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장들이 그가 밤 수입회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돈은 나중에 갚으라”며 두 컨테이너를 외상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눈물나게 고마웠지만, 외상으로 받으면 품질이 떨어질 것 같아 거절했다.

간난신고 끝에 들여온 첫 컨테이너는 3일 만에 다 팔았다. 두 번째 컨테이너도 3일 만에 팔았다. 신이 났다.

그러나 생소한 땅에서 그에게 닥치는 고난과 견제는 상상 이상이었다.

사채업자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도망친 사장이 밀린 사채를 갚으라며 집기를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북한에서 별게 다 기어 들어왔다. 당장 북으로 꺼져라”는 욕을 매일 먹었다. 그때마다 그는 “내게 빌려준 것이 아닌데, 왜 내게 갚으라고 하냐”며 당차게 맞섰다.

경쟁업체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업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신 씨가 알던 착한 한국인은 없었다.

입사해 몇 달 지났을 때 신 씨는 한국의 경쟁업체 사장이 중국의 거래업체에 “저 여자 중국에 밤 사려 가면 신고해 북송시키라”고 전화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북송이란 단어만 들어도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그에게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말이었다.

신 씨는 “그 사장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말할 수 있지 다른 경쟁회사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고 회상했다.

밤 수출 및 판매 시장에는 여러 개의 회사가 있다. 신 씨는 이중 유일한 여사장이었고, 나이도 제일 어렸다.

밤마다 한국 오프라인 거래처 사장들이 찾아와 밤을 받아주는 대신 접대를 요구했고 3차까지는 기본 코스가 됐다. 물어보니 한국에선 이런 게 당연하다고 했다. 처음 몇 달은 관행인가 싶어 따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좋은 밤을 좋은 가격에 가져다주면 내게 고마워해야지 내가 왜 이 사람들에게 접대를 해야 하지? 이런 식의 사업은 할 수 없다.”

그는 한국 거래처 사장들에게 더는 접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들은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떠나가 경쟁업체 고객이 됐다. 몇 달이 지나자 거래처들이 거짓말처럼 다 사라졌다. 밤을 수입해도 팔 곳이 없는 것이다.

신 씨는 홀로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억울한 대로 접대 요구를 다 받아줘야 하나”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럴 바엔 사업을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기에서 다시 새로운 곳으로 도전했다.

“대한민국은 IT 강국인데, 이 조건을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왜 밤은 오프라인에서만 팔아야 하나.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판매해보자. 밤은 계절상품이라 가을에만 팔린다는데 왜 여름에 팔면 안 되나.”

그때는 밤이 거리에서 구워 파는 정도로만 인식돼 있었지 온라인에서 밤을 산다는 개념이 없었다. 브랜드라는 개념도 없었다. 신 씨는 인터넷을 배웠고,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중국어에 능숙하고, 중국에서 밤 수출업체에서 일해 봤던 경험이 있고, 현지 업체 사장들과 가족 같은 사이로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다른 경쟁사들이 가격 조건을 가장 중요하게 따질 때 그는 중국 현지를 돌면서 하나하나 좋은 밤을 골랐다. 그래서 어떤 업체보다 품질과 가격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차별화를 하기 위해 ‘키즈약밤’ ‘신영약단밤’ 등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키즈는 국산에 비해 알이 작은 약단밤이란 의미였다.

대박이었다. 2011년 3월 홈페이지를 만들었을 때 마침 한국에는 티몬, 그루폰 등 미국의 소셜커머스 업체들이 막 진출했다. 그곳에 입점해 아이스박스를 처음 쓰기 시작했더니 여름에도 불이 나게 판매가 됐다. 어떤 날은 너무 물량이 많아 거래하는 우체국 전 직원들이 우수고객을 도와준다며 달라붙어 택배를 포장해줄 정도였다.

그해 티몬 한 곳에서만 11억 원의 매출이 났다. 회사 전체 매출은 20억 원이 넘었다. 지금은 밤 시장이 온라인 판매가 위주다. 2차, 3차를 요구하며 갑질하던 오프라인 중간 거래업체 사장들도 사업을 접고 사라졌다.

동아일보

올해 10월 고성 통일전망대에 선 신경순 대표. 그는 “이 해변을 따라 쭉 올라가면 내 고향 청진이 있다”며 “1년에 몇 차례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고성을 찾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고 말했다. 신경순 대표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공짜는 없다

신영무역 매출액이 늘어나자 2012년부터 관세청, 국세청 등에서 3번 연속 세무조사가 들어왔다. 신 씨는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거래처 사장들에게서 세금계산서를 받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세금에 무지했던 신 씨에게 “계산서를 발행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고 주장했고, 신 씨는 나중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라 그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

세무조사가 들어오자 모든 거래금액의 추징금과 가산세는 그의 몫이었다. 3억 넘게 세금을 내고 나자 사업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사업을 했던 이유는 추징금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추징금을 다 갚고 나니 2016년부터 귀신같이 매출이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 사업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세무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머리를 싸매고 세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신영무역은 이제 매년 수십 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모범적인 납세자가 됐다.

물론 순탄한 사업은 없다. 잘 나가면 업계에서 집중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고, 매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일이 터진다.

신 씨는 “어제가 모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오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좌우명은 “위기는 기회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이다. 북한에서 갖고 있던 신조라고 했다.

신 씨의 인생사를 듣고 보니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들판의 잡초가 떠올랐다.

북에 앉아 굶어죽을 대신 탈북을 선택했고, 중국에서 피타게 중국어 공부를 해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금융위기 때 파산한 회사를 접수했고, 거래처 회사들이 다 떠나자 온라인을 개척했다. 요즘도 그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진 뒤로 더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다.

궁금했다. 가냘프고 연약한 체구 어디에서 굴하지 않는 용기, 위기에 맞서는 용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부드러운 목소리 어디에서 단호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이 나오는 것일까.

그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고 있다. 잠재력과 능력이 닿는 한까지 걷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인터뷰를 마치며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잡초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