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南에 피살사건 책임 떠넘긴 北… 한마디 반박도 못한 정부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北 “미안하다” 35일만에 말바꿔

북한은 30일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 사살·소각 사건에 대해 “자기 측 주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남측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5일 통일전선부 명의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메시지를 전해왔을 때와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요청한 공동 조사 제안을 한 달 넘게 뭉갠 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였는데도 정부는 한마디도 항의하지 않았다. 정부 안팎에서는 “시신 소각 입장을 번복하고, 월북 사건으로 몰아가는 등 북한의 만행에 면죄부를 주려는 우리 정부·군 당국의 태도가 이 같은 치욕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북한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씨 사살·소각 사건에 대해 “우리 측 수역에 불법 침입한 남측 주민이 단속에 불응하며 도주할 상황이 조성된 것으로 판단한 우리 군인의 부득불 자위적 조치”라며 “남측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측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각종 험담을 묵새기며 최대의 인내로 자제해왔다”며 “남쪽에서 이 사건을 국제적인 반공화국 모략 소동으로 몰아가려는 위험천만한 움직임이 노골화되고 있는 심각한 현실은 우리의 아량과 선의의 한계점을 흔들어 놓고 있다”고 했다. 이씨 사살은 정당했고, 오히려 남측이 북측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취지다.

국방부와 통일부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의 사실 규명과 해결을 위한 노력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며 “이를 위해 남북 간 소통을 위한 군 통신선의 우선적 연결을 촉구한다”고만 했다.

조선일보

공무원 시신·소각 관련 정부·북한 발언


한 달 전 ‘사과’ 뜻을 전하며 남측 기류를 살피던 북한이 고압적 태도로 돌아선 것은 문재인 정부가 이번 사건이 남북 관계의 악재로 작용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지난달 24일 공무원 이씨 사살 사건을 발표하며 “우리 군은 다양한 첩보를 정밀 분석한 결과, 북한이 북측 해역에서 발견된 우리 국민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튿날 북한이 ‘이씨의 시신을 소각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통지문을 보내오자 정부 기류가 급변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에서는 “국방부 발표가 섣불렀다”는 얘기가 나왔고, 여기에 더해 “재발 방지를 위해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급속 확산했다.

서욱 국방장관은 지난 23일 국회에서 시신 소각 정황과 관련, “(군이) 단언적 표현으로 국민에게 심려를 끼쳤다”고 했다. 이를 두고 “입장이 후퇴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북한도 이날 “보수 패당이 그토록 야단법석 대는 ‘시신 훼손’이라는 것도 남조선 군부에 의해 이미 진실이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군이 ‘시신 훼손’ 발표를 사실상 부인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해경도 “이씨가 충동적으로 공황 상태에서 월북했다”며 월북설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이번 사태의 의미를 격하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서 북측에 잘못된 시그널을 준 것으로 해석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28일 국회 ’2021년도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우리 국민 사망’이라고 말했다.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을 두고 단순 안전사고를 연상시키는 용어를 써 북한의 책임을 희석하려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우리 정부가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태도 변화의 빌미를 줬다”며 “이번 북한의 발표는 자신들은 책임이 없으니 이에 호응하며 시신 훼손 문제 등을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우리 정부에 가이드라인을 준 것”이라고 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서 “(북한이) ‘미안’ 한마디로 마치 모든 면죄부를 받은 듯 자신들의 끔찍한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며 “그럴수록 남북의 화해는 요원해지고 불신의 골은 더 깊어진다”고 했다.

[양승식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