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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원조 007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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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지난 1964년 숀 코너리의 모습.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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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비밀 요원 007 제임스 본드역의 원조인 스코클랜드 배우 숀 코너리가 31일(현지시간)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BBC와 AP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유가족들은 코너리가 그동안 거주하던 바하마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코너리는 최근 건강 상태가 악화됐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제1장관은 타계 소식에 “우리 나라는 오늘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시했다.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배우 중 최고로 평가를 받아온 본명이 토머스 숀 코너리는 1930년 스코틀랜드 수도 에딘버러에서 화물차를 운전하는 아버지와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2차세계대전 중 가족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한후 우유 배달과 철강 근로자 등 여러 직종에서 일하다가 영국 해군에 입대해 3년간 복무했으나 위궤양으로 전역해야 했다.

에딘버러로 돌아온 코너리는 운동으로 단련된 몸으로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 출전해 3위를 차지했으며 프로축구선수가 되는 것도 검토했으나 선수 생명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배우의 길을 선택했다.

뮤지컬과 TV드라마, 2류영화에 출연하다가 할리우드에서 디즈니 영화 두편에 출연했던 코너리의 인생은 이언 플레밍의 스파이 소설 영화 제작권을 따낸 미국 프로듀서 앨버트 브로컬리와 해리 살츠먼에 의해 바뀐다.

이들 프로듀서들은 당초 007 제임스 본드 역으로 케리 그랜트를 검토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제임스 본드역을 맡을 수 있는 배우를 찾았지만 비싼 몸값으로 인해 대형 스타 대신 알려지지 않은 영국 배우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브로컬리와 살츠먼은 “까무잡잡하고 잘생긴” 코너리가 본드역에 어울릴 것으로 보고 오디션도 없이 배역을 맡겼다.

1962년 플레밍이 거주하던 자메이카를 배경으로 한 첫 시리즈 ‘닥터 노’는 5950만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으며 플레밍 소설 애독가였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닥터 노’의 성공에 힘입어 코너리는 ‘007 위기일발’ ‘골드핑거’ ‘선더볼’ ‘007 두번 산다’에 잇따라 출연했다. 코너리는 007 시리즈의 성공으로 백만장자가 됐지만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41세에 더 다양한 연기를 위해 본드역을 더 이상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6탄인 ‘007과 여왕’은 처음으로 영국 배우가 아닌 호주의 조지 레이즌비가 제임스 본드 연기를 했다.

코너리는 7탄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것을 끝으로 제임스 본드역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이같은 결정에 할리우드에서는 코너리의 배우 생명이 끝날 것으로 봤으나 그는 모험과 드라마, 코미디 등 다양한 배역을 맡으며 성공적인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제임스 본드 은퇴를 선언했던 코너리였지만 1983년에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의 주연과 제작을 하면서 한차례 더 출연한다.

코너리는 ‘붉은 10월호’에서는 러시아 잠수함장을, ‘인디애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서는 주인공 인디애나 존스의 부친인 헨리 존스 역을 연기했으며 1987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언터처블스’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이밖에 출연한 영화로 '더록' '머나먼 다리' 등이 있다.

코너리는 영국의 높은 소득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주로 바하마의 린퍼드케이에서 거주해왔다. 하지만 모국인 스코틀랜드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생전에 영국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지해온 코너리는 그는 2014년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 결과에 따라 바하마에서 스코틀랜드로 귀향을 할 수 있다고 밝혔으나 모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jjyoon@fnnews.com 윤재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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