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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이슈 미술의 세계

"모노 드라마가 이렇게 고독할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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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텅 빈 무대에 육중한 콘트라베이스 한 대가 놓여 있다. 덥수룩한 수염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배우 박상원(61, 서울예술대학교 공연학부 연기과 교수)이 자신보다 키가 큰 악기에 다가가 4개 현을 가볍게 만지고 활을 긋자 깊고 묵직한 저음이 공간을 가득 에워싼다. '인간시장'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에서 봐 온 반듯한 이미지는 없다. 연기 인생 40년 만에 1인극 '콘트라바쓰'에 도전장을 낸 그다.

"연기는 액션과 리액션의 주고받음인데, 이 작품은 종합운동장을 하염없이 몇백 미터 계속 뛰는 것과 같아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고 공허할 줄은."

지난주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만난 그는 탈진한 듯 말을 쉬엄쉬엄 이어갔다. 배우 1명이 홀로 극을 이끌어가는 모노 드라마는 배우의 연기력과 대사 숙련도, 배우와 관객 간 몰입감이 승패를 가른다.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것 때문에 1인극에 끌렸어요. 못하면 못하는 대로 판타지나 트릭이 없어 정직한 작업이니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콘트라베이스 독일어 이름을 본뜬 연극 '콘트라바쓰'는 오는 7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 '콘트라바스'가 원작이다. 작품과 대관이 결정된 지난 8월 중순부터 그는 남산예술센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나인 투 나인(아침 9시에서 밤 9시까지) 연습을 하다 요즘은 목 관리 차원에서 오후에만 연습해요."

브람스 교향곡 제2번 1악장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템포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 '빠르게! 하지만, 지나치지 않게'다. 오케스트라에서 계급이 가장 낮다고 자조하는 주인공의 위축된 마음이 담겨 있다. "그에겐 모든 상황이 극단적이에요. 세상에서 소외됐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세라'를 꿈꾸죠.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를 기다리듯이."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낮은 음을 연주하는 주인공은 소프라노 세라를 갈망하지만 가 닿을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한다. "사실 해고될 위험이 없는 안정적인 공무원 신분인데도 가장 불행해 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상대적으로 평가해요. 누구나 만족하는 사람이 없어요. 쟤는 애인이 있으니까, 쟤는 평수가 큰 아파트가 있으니까, 쉴 새 없이 비교하는 게 인간이죠."

그래도 극은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송어'를 연주하며 희망에 노크한다. 템포는 '알레그로 비바체', '빠르게 아주 빠르게'다. "꿈을 향해 이제 빠르게 도전하라는 의미가 있어요. 관객들이 이 연극을 보고 나서 더욱 힘차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탁자에 놓인 대본집이 눈에 들어온다. 너덜너덜하다. 수없이 수정 작업을 거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꿈을 꾸고 나서 대본을 바꾼 적도 있어요. 관객이 지루하면 안 되니까 중간에 '테스형'을 언급하기도 하고, 좌석 거리 두기 얘기도 나옵니다."

연기뿐 아니라 무용, 발레, 사진,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다. "전 끊임없이 뭘 해야 합니다. 해바라기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초조해져요. 나이가 들었다고 아무 배역이나 하고 싶지 않아요. 좋은 선택을 위해서는 바빠야 합니다."

[이향휘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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