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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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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 대통령궁 안치...아르헨티나, 사흘간 국가 애도기간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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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692경기에 출전 352골 기록. 여전히 역사상 최고의 선수 논쟁에서 1~2위 다퉈

조선일보

마라도나를 전세계에 알린 계기는 아마 이 골 장면에서 나왔을지 모른다.마라도나(왼쪽에서 두번째)가 1986년 멕시코월드컵 당시 잉글랜드와의 8강에서 두 번째 골을 넣는 모습. 미드필드부터 60m를 단독 드리블하며 귀신같은 페인팅으로 5명의 수비수를 차례로 따돌리고 골키퍼마저 제치고 환상적인 골을 터뜨렸던 것. 그는 이날 멀티골을 기록하며 2대1 승리를 이끌었고, 월드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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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가 25일(현지시각) 6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별세한 후 아르헨티나 대통령실은 성명을 통해 3일간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 기간 마라도나의 시신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궁 카사로사다에 안치될 예정이라고 현지언론은 보도했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26일부터 28일까지 일반인들이 대통령궁의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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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나폴리 시내에 마라도나를 추모하는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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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축구 스타인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매번 “마라도나를 뛰어넘었는가”란 질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만큼 마라도나가 이룬 업적과 퍼포먼스는 강렬했다. 뛰어난 축구 유망주들이 나올때면 어김없이 제2의 마라도나란 수식어가 붙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선수였길래 은퇴 후에도 이 같은 찬사를 받는 것일까.

아르헨티나리그는 물론 이탈리아와 스페인리그를 거치면서 23년간 선수 생활을 한 그는 통산 692경기에 출전, 352골을 기록했다. 역대 최연소(16세) 국가대표로 선발된 그는 월드컵에 4차례 출전해 1986년 우승과 1990년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는 그의 축구 인생을 다 설명할 수 는 없다. 마라도나 축구 인생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팬들 중 상당수는 그의 롤러코스터 같은 축구 인생사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골든 보이’로 통하는 마라도나는 196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외곽 빌라 피어리토란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일한 놀이는 축구. 다섯 살때 이미 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6세도 되기전에 프로 1군인 아르헨티노 주니오스에서 축구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1979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아르헨티나를 정상에 올려놓으며 ‘축구신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곧바로 1982년 스페인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됐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와의 포틀랜드 전쟁의 여파로 이렇다할 성적을 못올린데 이어 마라도나는 브라질전에서 폭력을 휘두른 대가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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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 신의 손 당시 득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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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라도나는 1986년 아르헨티나를 세계 최고봉에 올려놓으며 ‘월드스타’로 떠오른다. 마라도나는 현란한 마술을 보여주며 8강전부터 잉글랜드 벨기에 서독을 연거푸 무너뜨리는데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다. 문제의 ‘신의 손’ 사건이 불거진 것도 이 때였다. 멕시코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마라도나가 팔로 선제골을 낚은 뒤 “신의 손을 맞고 들어갔다”고 한 말 때문이다.

마라도나는 손으로 골을 넣은지 3분 뒤 축구전문가는 물론 선수들까지 ‘역대 최고’라고 평가하는 골을 뽑아낸다. 미드필드부터 60m를 단독 드리블하며 귀신같은 페인팅으로 5명의 수비수를 차례로 따돌리고 골키퍼마저 제치고환상적인 골을 터뜨렸던 것. 이후 마라도나는 165cm도 안되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펠레이후 ‘마술과 같은 축구(Magical play)’를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평가받았다. 4년뒤 이탈리아월드컵에서도 녹슬지 않는 기량을 선보이며 팀을 준우승에 올려놓았다. 마라도나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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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입단할 당시 스타디움엔 팬 수만여명이 몰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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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는 국적이 아르헨티나지만, 이탈리아 나폴리 시민들에겐 자식 같은 존재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나폴리 유니폼을 입고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에서 맹활약한 마라도나는 1987년과 1990년 두 차례 나폴리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현지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난 2017년엔 마라도나가 나폴리의 명예시민이 되자 시내 중심에 있는 델 플레비시토 광장에서 마라도나의 팬 1만여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유서 깊은 남부의 중심 도시이지만 마피아의 분파 카모라의 근거지라는 오명과 경제난, 실업난 속에 쇠락의 길로 접어든 나폴리는 마라도나 덕분에 신앙과 마찬가지인 축구에서 만큼은 자존심을 한껏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마라도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1990년 나폴리에서 열린 이탈리아 월드컵 4강전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대부분의 나폴리 시민들이 마라도나가 뛴다는 이유만으로 조국 이탈리아 대신에 아르헨티나를 응원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마라도나는 1991년 코카인에 양성 반응을 보이며 이탈리아 리그를 떠나 스페인 세비야로 이적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나폴리 시절 수 백 억원의 세금을 내지 않은 혐의로 이탈리아 내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지금도 나폴리 시내 곳곳이 마라도나 벽화들로 장식될 정도로 마라도나는 여전히 나폴리 시민들의 숭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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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는 항상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중심에 있었다. 그가 하는 말, 행동은 언제나 톱 뉴스로 다뤄질만큼 관심거리였다. 사진은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신 언론 인터뷰에 응한 마라도나 모습. 표정이 어둡다. 당시 마라도나는 월드컵 도중 도핑 테스트에 적발돼 중도 귀국해야만 했다. 1년 간 출장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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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뼈아팠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뛰면서 ‘영웅’으로 대접받다가 1990년 미국월드컵 4강에서 이탈리아를 꺾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하루아침에 야유와 비난의 대상으로 바뀌기도 했다. 마라도나는 1994년 미국월드컵때도 출전했다가 예선 2경기를 뛰고 금지약물 복용으로 다시 불명예를 안았지만 보카 주니어스에서 1997년까지 선수생활을 계속한뒤 37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마라도나는 조국 아르헨티나에 단순히 월드컵 우승컵을 넘어 큰 자부심을 안겼고, 많은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 은퇴는 했지만 각종 자선 경기에 출전했고 아르헨티나 프로팀 감독을 하며 계속 축구와 함께 했다.마라도나는 2000년 ‘나는 디에고’라는 자서전을 출간, 당시 수년간 책 한권 사보지 않았던 노동자들마저 어려운 경제상황속에서도 책을 사서읽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저소득층을 돕기 위해 사인이 담긴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경매에 부치기도 했다.

[주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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