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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는 교활한 짐승"이라던 이순신을 日이 존경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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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톺아보기-34] ※톺아보기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본다'는 순우리말입니다. 한중일 톺아보기는 동북아 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이슈부터 소소한 소식까지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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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조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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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경모하는 장수는 이순신이다. 영국 넬슨 제독의 명성이 높다지만 인격과 천재성에서 그에 필적할 순 없다."-사토 데쓰타로

사토 데쓰타로는 메이지 일본 해군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일본이 '전쟁 영웅'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러·일 전쟁 승리를 도운 최대 공로자입니다. 그는 그의 이론을 집대성한 '제국국방사론'(1908)과 '절세의 명해장 이순신'(1927) 등 저서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위와 같이 평했습니다. 사토는 이순신 장군을 나폴레옹의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격파하고 전사해 유럽 해전 역사의 신화가 된 영국의 넬슨 제독을 넘어선 '동서 해장(海將) 중 제1인자'로 극찬하기도 했죠.

한국인에게 이순신 장군은 세종대왕과 더불어 두말할 나위 없는 최고의 영웅입니다. 조선의 종묘사직이 그래도 5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건 한국인들만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그로 인해 수군이 궤멸되다시피 하고 침략의 망상을 접어야 했던 일본 내에서도 그를 우러르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비범했던 능력은 '징비록'과 '이충무공전서' 등 조선의 사서뿐 아니라 '조선이순신전' '제국해군사론' 등 일본인들이 쓴 서적에도 잘 나타나 있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인 탓인지 '이순신'이란 이름은 지금도 상당히 잘 알려져 있고 관련 연구도 많이 이뤄져 왔습니다. 지난주에는 100원짜리 화폐에 있는 장군의 영정이 친일 화가가 그렸다는 이유로 교체될 수 있다는 뉴스가 일본에도 전해지며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순신, 日교과서에 이름 나오고 도고보다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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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천거했던 서애 유성룡이 전란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 징비록(좌)과 일본에 유출돼 번역된 조선 징비록(우). 일본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은 조선 징비록 서문에 "조선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책을 근간으로 삼아라"고 쓸 만큼 징비록이 일본에 던진 충격은 컸다/사진=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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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과서에 이름이 등장하고 높은 인지도까지 있는 한국인은 찾기 쉽지 않지만, 이순신 장군은 예외입니다. 역사학자 이종각 교수는 저서 '일본인과 이순신'에서 "한국인 중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는 건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며, 임진왜란과 관련해 장군과 거북선 사진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실제로 일본인들에게 "이순신 또는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질문할 경우 "도고보다 이순신 쪽이 더 유명할 것"이라는 대답을 듣기도 합니다. 영화 '명량', 드라마 '임진왜란 1592' 등에 출연했던 배우 다케다 히로미쓰도 과거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교과서에 일본군이 졌다는 내용이 있다"며 "일본인 대다수가 알고 있을 만큼 이순신 장군은 중요하게 다뤄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일본 우익들을 중심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설명을 굳이 교과서에 넣을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이 나오기도 합니다.

사실, 일본에서 이순신 장군 이름이 처음 알려지게 된 발단은 임란 종결 후 약 100년 뒤인 1695년 '징비록' 일본어판인 '조선 징비록' 출간입니다. '징비록'을 훔쳐다 번역해 내놓은 조선 징비록을 통해 일본인들은 식자층을 중심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게 됐고, 이에 영향받아 출간된 '조선군기대전' 등 후속 저작물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日국민작가 "이순신은 실존 자체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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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를 그린 대표작 `언덕위의 구름`과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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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일본인들 사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데는 '일본의 국민작가'로 통하는 시바 료타로의 역할이 컸습니다. '올빼미의 성' '료마가 간다' 등 숱한 베스트셀러와 수상작을 남긴 그는 일본인들이 "역사 교과서 대신 시바 료타로의 소설로 근현대사를 배운다"고 할 만큼 일본 내에서 높은 위상을 가진 역사 작가입니다. 특히 대표작들 중 러·일 전쟁 시기를 무대로 한 '언덕 위의 구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직접 한국을 여행하고 낸 기행 문집 '한(韓)나라 기행' 등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실존 자체가 기적' '영국의 넬슨 이전 유일한 명장' 등으로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의 역사관은 메이지 시대를 과하게 찬미한 데 반해, 일제의 침략적 성격에 대한 반성은 부족하고 이순신 장군을 발견한 건 조선이 아닌 메이지 해군이었다고 하는 등 오류나 한계도 많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덕 위의 구름'만 해도 누적 발행부수가 2000만부를 훌쩍 넘고 2009년에는 드라마화 돼 NHK에서 인기리에 방영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순신 장군만 집중 연구하거나 관련 저작물을 내놓은 여타 일본인 학자들보다 그 한사람이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일본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데는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日해군, 자신들 증오한 이순신 참배하고 승리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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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9세기 중반 출간된 `에혼조선정벌기`에 그려진 이순신 장군의 모습(좌)/ 진해에 있던 일본 해군은 매년 장군의 위패를 모신 통영 충렬사를 찾아 제사를 올렸다(우)/사진=국립중앙박물관e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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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 해군에서 이순신 장군을 경외하는 현상이 퍼져 있었다는 건 많은 사료와 증언으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러시아 발틱 함대와의 일전을 앞둔 일본 함대의 소위 가와다 이사오가 장군의 혼령에 승리를 빌었다는 일화는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77년 10월 발행된 일본 월간지 '아시아 코론'에는 전역 후 문필가로 활동하던 가와다가 자신을 비롯한 일본 해군들이 연중행사로 통영 '충렬사'를 참배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시바 료타로는 장성급 엘리트 사관과 교관까지 이순신 장군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고 그들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서술한 바 있는데, 이 같은 현상은 메이지 이후 다이쇼 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 등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들에 대해 가졌던 증오심이 얼마나 컸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장군은 그들을 "짐승 또는 귀신" 이라며 "신의가 없고 교활, 흉악해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라고 칭했습니다. 막내아들을 그들의 손에 잃은 후 표현한 애끓는 심정과 원망에서 적의가 뼈에 사무쳤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해군이 이순신 장군을 치켜세웠던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유례를 찾기 힘든 발군의 능력과 고매한 인품을 갖춘 인물이기 때문에 피아 구분 없이 같은 군인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는 겁니다. 신토 등 민간 신앙이 발달해 죽으면 어차피 모두 신이 되고 훌륭한 군인은 군신(軍神)이 된다고 믿는 일본인들의 독특한 감각으로는 적장을 숭배한다는 게 별로 이상할 게 없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장수와 싸웠던 자신들 역시 뛰어났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는 분석이 더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이순신 찬양, 열세인 해군력 확장 위한 꼼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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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의 분수령이었던 쓰시마 해전때 도고가 탔던 전함 `미카사`/사진=미카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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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일본군이 굳이 300년 전 다른 나라의 장수를 소환해 찬양한 이면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을 거란 지적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순수한 존경심보단 일본군의 필요에 의한 전략적 결과였다는 겁니다. 에도 시대에 간행된 서적들에서 이순신 장군은 비범한 인물로 그려지긴 했지만, 주로 부각된 이미지는 '충(忠)'이라는 군인의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시대 이후엔 국운을 결정한 '해전의 명장'이란 점에 초점이 옮아가는데, 여기에는 일본 내 환경 변화가 작용했습니다.

당초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취약했던 해군력 증강을 위해 영국 해군을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육군과 군사 주도권을 놓고 벌인 싸움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 들고나온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라는 겁니다. 이때 일본 해군은 '세계 4대 해전'이란 말까지 만들어 해군이 살아야 일본이 산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 들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본의 연구·출판은 급증했는데 1892년 '조선 이순신전'에 처음 이순신 장군을 영국의 넬슨에 빗댄 부분이 나온 이후 두 인물을 비교하는 담론이 잇따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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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일본인 최초로 미국 `타임`지 표지에 실린 도고(좌). 도고가 "이순신에 비하면 난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며 그를 찬양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근거는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의 함대는 `정자(丁字) 전법`을 통해 러시아 발틱함대에 승리했는데, 이 정자 전법은 입안자는 부인했지만 이순신의 `학익진`을 원용했다는 설이 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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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본 해군은 '서양의 넬슨'에 대응하는 '동양의 이순신' 장군을 내세워 해군 전력 증강을 위한 필요성을 역설하는 선전 전을 도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선전과 찬양의 대상은 도고가 이끈 일본 함대가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로 거둔 대승을 기점으로 이순신 장군에서 도고로 옮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도고를 띄우기 시작한 이후 더 이상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과 찬사를 볼 수 없게 된 건 아닙니다. 일제가 군국주의 노선을 강화하고 대륙 침략까지 본격화하는 1920년대 접어들어 이순신 장군을 폄하하는 기술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보다 더 많은 사료들에서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한 구절이 발견되고, 이런 경향은 현대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민족적 영웅, 정쟁에 이용 돼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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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중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중 `임진일기`(좌)와 뒷부분에 `一心(일심)` 수결을 휘갈긴 흔적(우)/사진=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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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학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학문 자체의 가치 뿐 아니라 '나라를 구한 영웅'에 대한 역사적 수사가 민족의식을 고취해 국난 극복의 원동력이 돼 왔다는 데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유독 장군의 이름이 정치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모습 입니다. 민족적 영웅의 이름이 소모적이고 터무니없는 맥락에서 너무도 가볍게 소환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일본은 적장인 이순신 장군의 존재를 자신들의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평가하고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를 밀어내고 조선을 강제 병합해 열강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반면, 조선은 박은식 선생이 지적했듯이 구한말 "이순신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결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도고와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난 명장을 낳고도 사리사욕에 눈먼 권력층의 무능과 안일함으로 인해 국토는 유린되고 국민은 치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난중일기'의 원본 뒷표지에는 장군이 '일심(一心)'이란 수결(手決·서명)을 수없이 휘갈겨 쓴 필적이 남아 있습니다. 일심은 문자 그대로 장군의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부디 현재 지도층들도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정치적 도구로 삼아 그 명성에 먹칠하는 대신, 일심 정신을 본받아 어떻게 하면 진정 나라에 기여할 것인가 물심양면 고민하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합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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