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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데스크의눈] 정치의 사법화와 좋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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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검찰 뒤엉킨 진흙탕 싸움

정치적 해결 못보고 법원으로

대화·타협 부재 정치 실종 시대

정치 걱정하는 국가 미래 없어

윤석열 검찰총장은 11월 26일 서울행정법원에 법무부와 추미애 장관을 상대로 직무집행 정지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윤 총장은 10월 22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추 장관을 겨냥해 작심 비판을 쏟아냈지만, 권한 다툼을 법원으로 가져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법무·검찰 조직이 혼란에 빠지고,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갈 것 같아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추 장관과 여권의 집요한 찍어내기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법원에 손을 내밀었다. 추 장관이 지난달 24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윤 총장에 대한 직무배제 조치 및 법무부 징계위원회 징계 청구를 밝힌 지 이틀 만이다. 법원이 1일 윤 총장 복귀를 결정한 것과는 별개로 4일 법무부 징계위가 징계 수위를 결정하면 윤 총장은 또다시 소송전을 불사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과 청와대, 법무·검찰이 뒤엉킨 진흙탕 싸움이 될 듯하다.

법원 쟁송을 원하지 않았던 윤 총장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제대로 된 정치가 작동하지 않아서다. ‘윤석열 사태’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추 장관의 과도한 윤석열 몰아내기의 절차적 정당성이나 문제점은 차후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이 정치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법원으로 갔다는 것은 우리 사회 ‘사법의 정치화’의 한 단면임은 분명하다.

세계일보

이우승 정치부장


정치권의 여야 공방 속에 상대 당을 서로 고소·고발하는 모습은 매우 익숙한 장면이다. 정치를 정치로 해결하지 않고, 법으로 해결하려는 현상은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다. 2019년 선거제 개편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등 개혁 법안에 대한 패스트 트랙 지정 과정에서 발생한 여야 충돌은 결국 쌍방에서 150건이 넘는 고소·고발전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3개월간 고소·고발된 현역의원만 100여명에 이를 정도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한다. 국정 현안을 맡아 처리하면서 갈등을 중재하고 협상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이 국정 현안을 대화로 풀지 못한 채 검찰과 법원 등 사법기관에 판단 권한을 넘기는 것은 분명 정상적이지 않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패스트 트랙 고소·고발 역시 이렇게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석열 사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정치 실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는 양면적이다. 영악하고 자기 이익에 밝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이면엔 기회주의적 인간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뜻하기도 한다.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

정치 실종의 시대는 대화와 타협의 부재와 같다. 정치의 사법화는 대화와 타협이 부재한 사회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진보 정치학자로 잘 알려진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 “총과 칼만 안 들었을 뿐이다. 일단 상대방 제안을 듣지 않고, 우리 제안은 반대하지 않는다”며 작금의 한국 정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사회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정치학자 칼 포퍼는 1938년 조국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독일에 침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집필했다. 이 책은 냉전시대 사회주의 국가를 비판하는 교과서로 부각되면서 일약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칼 포퍼는 비판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사회를 ‘열린 사회’로 정의했다. 정치적인 문제를 이성으로 해결하게 해주는 제도적인 장치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다. 우리는 국회라는 좋은 장치를 갖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이런 국회 고유의 역할을 제한하고 원활한 국정 운영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국민을 보듬는 것이 정치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한다면 주객이 전도됐다. 정치의 사법화는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를 걱정하게 한다. 정치인이 싸우고 또 싸우고, 국가기관이 싸우고 또 싸우는데 국민이 편하기는 어렵다. 임금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정치가 최고라는 중국 요순시대 한 농부가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를 되돌아볼 때다.

이우승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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