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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월드리포트] 일본에는 '가만히 OOO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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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겸 순회특파원 발령을 받아 일본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습니다. 그중 14일간의 자가격리 기간을 빼면 본격적인 '일본 살이'는 이제 2주 정도 된 셈입니다. 예전에 일본은 두 번, 휴가 때 관광으로 짧게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관광의 눈'이었고 지금은 '관찰의 눈'입니다.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버스로 도쿄 시내를 다니다 보니 신기한 장면이 제 눈에 계속 들어오더군요.

● 공사 현장의 '보디가드'

제가 사는 도쿄 미나토구에는 수도고속화도로가 머리 위로 지나갑니다. 교량 곳곳에서 보수 공사가 이뤄지고 있고요. 그런데 공사 현장마다 어김없이 형광띠를 걸친 사람이 1~2명 계속 서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했던 건 아닙니다. 공사에 직접 투입되는 근로자가 잠시 인도에 나와 있는 정도로만 알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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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량의 다른 공사 현장에서도, 건물을 새로 짓는 현장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현장과 행인을 수시로 오갑니다. 행인들이 현장 쪽에 가까워질라 치면 얼른 경고를 합니다. 그제야 그들이 '안전 요원'이겠다, 감이 왔습니다. 짧은 일본어와 손짓, 몸짓으로 물어봤습니다. 감이 맞았습니다. 수도고속화도로 구간 중 미타 인근에서 일하는 한 안전 요원은 "우리는 상시 대기하는 안전 관리자입니다.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정도로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입니다. 대형 크레인이 몇 대나 들어선 공사 현장을 지나가봤고, 도심 한복판에 높은 빌딩이 올라가는 공사장도 지나갔지만 제 몸은 제가 지켰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로자 한 명 당 인건비가 얼마인데, '작업' 대신 '가만히 서 있게' 하는 게 얼마나 낭비야…건설업자도 아닌 주제에 어느 때부터인가 그들의 입장에 동화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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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요원이 '가만히 서 있는' 일본 공사 현장은 안전사고 사망자의 비교로 그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일본 건설현장의 안전관리 체계 분석 및 시사점'을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보다 건설사업 규모가 3배 정도 큽니다. 상시 근로자 수도 한국이 160만 명, 일본이 480만 명입니다. 그런데 2017년 기준으로 한국 건설업 사망자 수는 579명인데, 일본은 323명이랍니다.

고2 겨울 방학 때 새벽 인력 시장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겉보기 등급이 20대 중반은 돼 보였는지 쟁쟁한 아저씨들을 제치고 늘 3순위 안에 지명됐습니다. 서울 대림동 현장에 나간 지 열흘쯤 지났을 겁니다. 당시 엘리베이터를 넣기 위해 비워놓은 공간 바로 옆에 사람들은 철근 자재를 옮겨놓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무너지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자재를 쌓으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지고 온 철근을 올려놓는 순간, 탑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아래층으로 수십 개가 쏟아져 내리는데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려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1층에 사람이 있었는데...' 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작업 반장의 온갖 욕지기가 들려왔습니다. 그중에서 "너 때문에…"라던 말만 또렷이 기억납니다.

천만다행으로 철근에 깔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굴러온 철근에 머리를 살짝 맞은 사람, 다리가 긁힌 사람 등 두 명이 다쳤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일당은 6만 5천 원. 소개비 제외하고 5만 8천 원을 받아왔습니다. 그날은 작업 반장이 다친 사람들 약값 줘야 한다며 3만 원을 떼 갔습니다. 안전모는 알아서 쓰던 때였습니다. 현장에 위험한 게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사람도 없던 때였습니다. '3만 원만 떼 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어리석은 때였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여전히 공회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중대 재해가 일어난 사업장에 대해서는 사업주에게 엄하게 책임을 묻되, 안전사고를 예방하려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췄다면 면책한다는 게 골자입니다. "일하다 죽기 싫다"는 말과 "기업을 망하게 한다"는 말이 서로를 베어가며 적대하는 형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래전 '막노동 현장'을 소환한 건 일본에서 마주한 안전 요원 덕분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 당시보다 현장의 안전 수준이 많이 나아지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가장 기본적인 안전사고 예방 시스템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사고가 부러운 건 사실입니다. 산업 현장에서 일어난 죽음의 차이들, 이는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내일신문 3월 30일 자 <산재 사망자 절반 줄이기, 일본 건설 산업에서 배운다> 참고
조기호 기자(cjk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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