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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팬데믹 시대' 과학 뒤덮은 '권력'… 코로나 '백신의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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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 접종 앞두고 '신뢰의 위기'
팬데믹시대 키워드 ①정권 ②불신 ③격차 ④패권
정부 불신에 접종 거부, 美 절반은 외면
서구 백신 독점, 빈부 격차 민낯 드러내
코로나 이후 패권 경쟁 증폭... 비방 가열
한국일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2일 런던 다우닝가에서 코로나19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영국은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가 공동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사용을 세계 최초로 승인했다. 런던=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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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지 못하는 백신은 비극이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의 앨버트 불라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0월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 내용이다. 그는 “백신에 대한 정치적 미사여구가 증폭돼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있다”며 백신의 효능이나 안전성보다 신뢰의 위기가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아닌 정치적 잣대로 인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꺼린다는 하소연이다.

#코로나19가 미국과 유럽으로 급속히 확산하던 지난 5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세계보건총회(WHA)에서 “백신을 글로벌 공공재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서구가 지식재산권으로 백신을 독점해 다른 국가의 접종 권리를 저해할 것이란 우려가 불거진 시점에 나온 파격 선언이었다. 백신이 보건 문제를 넘어 패권 다툼의 수단으로 부각된 것이다.

①정권: ‘세계 최초’ 백신은 체제 우위 상징

한국일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월 후베이성 우한의 훠선산 병원을 방문해 의료진과 군인, 자원봉사자, 주민들을 격려하고 있다. 우한=신화 뉴시스 20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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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 이후 미국과 중국은 ‘발원 책임’을 놓고 무수한 공방을 벌였다.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소모전이었다. 이제 백신 개발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접종을 앞둔 주요국 정부는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백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지난 대선 기간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장담하며 노골적으로 선거에 동원했다. 미 정부도 전방위 지원사격에 나섰다. 워싱턴포스트는 “화이자가 연말까지 20억달러(약 2조2,000억원) 백신 공급 계약을 이미 체결했다”며 “민간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지만 이처럼 막대한 정부 지원금은 큰 힘이 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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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입소스. 그래픽=송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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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한술 더 떴다. 일찌감치 8월에 가장 먼저 백신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이미 100만명 넘게 백신을 접종했다면서 세계 최초 타이틀 경쟁에 불을 지폈다. 중국은 앞서 9월 방역 유공자 포상 행사를 거창하게 치르며 코로나19 종식을 선언했다. 미국이 확진자 700만명, 사망자 20만명을 넘어설 때다.

②불신: “정부 싫어, 그래서 백신 안 맞아”

한국일보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지난달 19일 백악관의 언론 브리핑장에 배치된 코로나19 발생 현황판 앞에 서 있다. 온통 붉은색이어서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7월 이후 넉 달 만이자 대선 이후 처음 열린 이날 브리핑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아 펜스 부통령이 주재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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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을 개발해도 국민들이 접종을 거부하면 무용지물이다. 정부를 불신하거나 리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접종에 대한 거부감이 증가할 수 있다. 프랑스 연구진의 4월 조사를 보면, 2017년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선택한 경우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지 않겠다”는 답변은 19%에 불과했다. 이와 달리 극우정당이나 극좌정당 후보를 지지한 응답자는 각각 30%와 32%가 ‘접종 거부’를 택했다. 아예 기권하거나 유권자로 등록하지 않은 정치 무관심층은 35%로 비율이 더 높았다. 신종플루가 한창이던 2009년 프랑스의 백신 접종률은 8%로 추락해 대다수 국민이 백신을 외면한 전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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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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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는 미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입소스의 9월 조사에서 “백신 출시 후 1~3개월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답변이 절반에 가까운 48%에 달했다. 13%는 접종을 아예 거부했다. 조 바이든 당선인이 코로나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을 주장할 경우 “믿는다”는 응답은 41%에 그쳤다. 트럼프 대통령(27%) 보다는 높지만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ㆍ전염병연구소장(62%)에는 한참 못 미친다. 대선 과정에서 정치가 백신의 신뢰를 떨어뜨린 셈이다. 갤럽의 10월 조사에서는 58%만 “백신을 접종하겠다”고 밝혔다.

③격차: 백신 ‘공유’ 외치면서... 서구 부자국들 백신 싹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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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의 정치화’ 개념도. 그래픽=송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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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에서 코로나 백신과 정치의 밀착은 더 적나라하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과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일본 등 선진 5개국이 벌써 백신 생산량의 절반을 확보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내년에 전세계 인구 3분의 1이 백신을 접종하겠지만 빈국에서는 1~2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내다봤다.

이에 세계보건기구(WHO)는 글로벌 백신 공급 프로그램 ‘코백스(COVAX)’를 추진하고 있다. ‘일부 국가의 모든 사람’이 아닌 ‘모든 국가의 일부 사람’이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내년 말까지 20억명을 접종할 계획이다. 문제는 돈이다. WHO는 지난달 24일 “백신 확보에 올해 당장 43억달러(약 4조7,000억원), 내년에는 238억달러(약 26조2,000억원)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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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입소스(9월 조사). 그래픽=송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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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전세계 최소 16개국에서 임상 3상을 진행하며 시장을 선점했다. 당장 해외에 우선 공급할 백신만 브라질(4,600만개), 터키(5,000만개), 인도네시아(4,000만개), 멕시코(3,500만개) 등 수억 개에 달한다. 서구에 비해 저렴한 가격은 중국산 백신의 확장성을 높일 최대 강점이다.

중국은 코로나19 발병 이후 150개국에 마스크 1,790억개, 방호복 17억3,000만벌, 진단 키트 5억4,300만개를 지원하는 ‘방역 외교’로 영향력을 키웠다. 이제 ‘백신 외교’도 주도할 참이다. CNN은 “중국이 보건 실크로드를 열고 있다”고 평가했다.

④패권: 백신 손에 쥐어야 세계 패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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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ㆍ바이오앤테크의 코로나19 백신과 화이자 로고. 런던=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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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은 무역에서 디지털로 전장을 넓히며 패권 경쟁을 벌여왔다. 이제 대결 무대가 팬데믹 시대의 생사를 가를 코로나19 백신으로 옮겨졌다. 백신의 국제표준을 선점하면 코로나 이후 글로벌 질서를 주도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자연히 비방이 난무하고 있다. 서방 언론은 “100만명을 접종했는데 부작용이 1건도 보고되지 않았다”며 중국 백신의 신뢰성에 줄곧 의문을 제기해왔다. 브라질에서 임상실험 도중 사망자가 발생하자 “조급한 중국의 무리수”라고 포화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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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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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중국은 “편집증에 사로잡혀 중국산 백신을 억압하는 광란을 멈추라”고 반박했다.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서구는 전염병을 통제하지도 못하면서 마스크부터 백신까지 온갖 오명을 중국에 덧씌우고 있다”며 “저들의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신 개발이 여의치 않은 국가들은 미중 사이에서 손익 계산이 한창이다. 한때 중국에 백신 공급을 요청했던 필리핀은 미국 화이자와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던 말레이시아는 화이자와도 계약을 체결했다. 3,500명의 미군이 주둔한 동맹 아랍에미리트(UAE)는 지난 9월 임상시험 와중에 중국산 백신 긴급사용을 승인했다. 경제와 군사에 이어 백신 블록으로 이해관계가 한층 복잡하게 얽히면서 미중 간 격돌 수위가 고조될 전망이다.


베이징= 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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