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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마스크 안 벗을 거면 신분증 맡겨라”… 초고가 아파트 배달기사 ‘갑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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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서울의 한 매장 앞에서 배달기사들이 배달을 준비하고 있다. 뉴시스


최근 한 배달대행 업체가 서울 초고가 아파트의 배달대행비를 2000원 추가로 받기로 해 논란이다. 업체 측은 해당 아파트의 소위 ‘갑질’ 때문에 배달기사들이 가기를 꺼려 고육지책으로 대행비를 올렸다고 주장하고 아파트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맞서고 있다.

◆업체 “한 번 가본 기사는 두 번 다시 안 가려 해”…인상 불가피

배달대행 서비스업체 ‘생각대로’ 성동구 지점은 지난 18일 가맹점주를 대상으로 성수동 ‘아크로 서울포레스트’에 배달비 2000원을 추가로 받겠다고 공지했다.

아크로 서울포레스트는 전용 198㎡(구 60평) 기준 분양가만 30억4200만원에 달하는 고가 주상복합 아파트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같은 평수 전세가 37억원에 계약된 바 있다.

이 지역의 또 다른 고가 아파트인 ‘트리마제’와 ‘갤러리아포레’도 지난해 배달 요금이 1000원 인상됐으나 추가 요금이 2000원이나 오른 것은 이 아파트가 처음이다.

지난 18일 생각대로 성동구 지점은 가맹점주들에게 “이 아파트는 경비업체가 기사분들에게 오토바이를 밖에 세우고 걸어서 들어가게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 하며 화물 엘리베이터만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며 “기존 할증 지역보다 더 기사분들이 배송을 많이 꺼리고 한 번 가신 기사분들은 두 번 다시 안 가시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원활한 배송을 위해 배달비 2000원을 추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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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측 공지 메시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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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측 “사실 무근” 부인

아파트 측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생활지원센터 관계자는 19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업체 측 주장처럼 배달기사들에게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게 하거나 신분증을 요구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입주 지정 기간으로 엘리베이터 내부 흠집을 막고자 일부 엘리베이터에 보양재를 씌워놨다. 화물용은 이삿짐 운반용으로만 쓰고 나머지 3개 엘리베이터 중 보양재를 씌운 2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보양재를 안 씌운 엘리베이터는 입주민만 이용하도록 했는데 보양재를 씌운 엘리베이터를 탄 배달기사가 화물용 엘리베이터로 착각한 것 아니냐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단지 내 배달 과정도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사들이 배달이나 택배를 전달하기 위해 단지 입구의 벨을 누르면 보안요원이 신분 확인 후 문을 열어주고 거기서 계단을 10∼15m 걸어 내려가면 로비가 나온다. 보안요원이 방문 목적 등을 쓰게 한 후 승강기를 이용하게끔 문을 열어준다”고 말했다.

‘배달을 마친 후 나올 땐 계단을 다시 걸어 올라와야 하냐’고 묻자 “그렇다. 웬만한 주상복합은 다 이런 식이다. 그 정도 갖고 불편하다고 말하면 배달 못 한다”며 “배달기사 한두 명이 어떤 불만을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대로 업체에서 현장을 와봤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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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 서울포레스트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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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 “마스크 안 벗으면 신분증 내라고도… 범죄자 취급”

반면 배달대행 업체 측은 “아파트에서 배달기사를 대하는 태도는 알려진 것보다 더 심하다”고 주장했다. 생각대로 성동구 지점 관리자 A씨는 이날 통화에서 “(가맹점주에게 보낸 메시지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며 “근처 ‘갤러리아포레’나 ‘트리마제’, ‘스타시티’도 그렇고 다들 (기사들에게)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게 한다. 비가 와서 우비를 벗고 있으면 (빗물로 더러워지니) 우비도 다 벗으라고 한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음식 냄새가 나면 입주민이 불쾌해한다는 게 주된 이유라고도 했다.

배달 시 헬멧 뿐 아니라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쓴 마스크까지 벗도록 한다고도 했다. 배달기사가 혹시 ‘절도’ 등 범죄를 저지를까 봐 우려해서라는 게 업체 측 주장이다. A씨는 “배달기사들이 헬멧과 마스크를 벗고 엘리베이터 안 CCTV를 꼭 쳐다보도록 보안요원들이 시킨다. 얼굴이 잘 안 보이면 ‘고개를 들라’고까지 한다”며 “그게 싫다고 거부하는 배달기사들에게 신분증을 맡기라고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A씨는 “배달기사를 무슨 범죄자, 하급 취급하니 아무리 돈 벌러 나오셨어도 기사분들 기분이 좋겠는가. 저희 소속 기사님들이 700명인데 대행비가 2000원 올랐는데도 다들 그 아파트는 안 가려 하신다”며 “가려는 기사님들이 없으니 제가 관리자라 대신 배달도 자주 갔다. 멀끔하게 입어도 배달하러 가면 ‘밑의 사람’ 보듯 하는 게 있더라”라고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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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배달 노조 “입주민 직접 내려와 받아가는 등 합리적 대안 필요”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 측은 비슷한 사례가 성동구 외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보고되고 있다고 전했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 기획팀장은 “배달기사는 화물 엘리베이터만 타라는 아파트는 상당히 흔하다”며 “배달기사들에게 ‘냄새난다’며 ‘주민들 눈에 띄지 않게 다니라’는 곳도 있었다”고 했다.

아파트가 정책상 주민 안전을 위해 차량 출입 제한이나 방문자 신원 확인 등을 하고 있다면 주민이 직접 1층에서 배달 음식을 받아가게 하는 등 아파트 차원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구 팀장은 “이런 경우 아파트가 한강공원처럼 배달 음식을 받을 수 있는 특정 구역을 만들어 배달을 시킨 주민들이 직접 그곳에 나와 음식을 받도록 해야 한다”며 “배달기사들이 일일이 단지 내에 걸어들어와 화물 엘리베이터까지 타게 하는 등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꼬집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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