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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무명 '키 작은 구두 아저씨'의 죽음… 슬픔에 빠진 국회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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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국회 인들의 구두를 닦아 주셨음에도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름을 알게 되었네요. 편히 쉬십시오.”

22일 국회 의원회관 5층의 한 귀퉁이. 손글씨로 ‘구두수선실’이라고 적은 종이 명패가 걸린 한 사무실 문에 수십장의 포스트잇(메모지)이 나붙었다. 20여년간 국회에서 근무한 어느 무명(無名)의 ‘구두 아저씨’에 대한 추모의 글이다. 사망 날짜조차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구두 아저씨’ 고(故) 정순태(63)씨의 죽음에 국회가 슬픔에 빠졌다.





어느 키 작은 구두 아저씨의 죽음



중앙일보

국회 의원회관에서 20여년 간 근무한 '구두 아저씨' 고(故) 정순태(63)씨를 추모하기 위해 여야 보좌진 협의회가 그의 사무실(구두수선실) 앞에 만든 추모 공간. 여야 보좌진들이 쓴 메모지가 문 앞에 붙어있다. 국민의힘 보좌진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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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의 사망 소식이 국회에 전해진 건 21일 오전이었다. 의원회관에서 청소를 하는 국회 직원이 아침 일찍 마주친 이영 국민의힘 의원실의 한 보좌진에게 “키 작은 구두 아저씨가 죽었다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곧 국민의힘 보좌진협의회(국보협)를 통해 국회에 전파됐다.

의원회관엔 두 명의 구두 아저씨가 있었다. 한 사람은 ‘키 큰’ 구두 아저씨, 또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최근 사망한 ‘키 작은’ 정씨였다. 사인은 간암이었다고 한다. 정씨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다름 아닌 키 큰 구두 아저씨였다. 그가 보이지 않던 정씨를 수소문 끝에 찾아낸 곳은 서울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이었다고 한다. 가족이 없는 정씨의 시신은 장례식도 못 치른 채 21일 정오에 경기도 고양시의 벽제 화장터로 향했다.



정씨와 한 공간에서 머물던 국회 보좌진들은 그를 “잘 웃던 아저씨” “항상 먼저 인사해주던 아저씨”로 기억했다. 의원회관 6층과 옥상의 흡연장에선 여러 보좌진과 어울리며 곧잘 담배도 태웠다고 한다. 그래선지 주변 사람들은 발인 1주일쯤 전에야 정씨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그와 마주쳤던 박준수 국보협 회장은 “마른 몸에 복수가 차 있어서 배가 볼록 튀어나 있었다”며 “‘몸이 안좋은 것 같은데 좀 쉬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씩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 게 아저씨와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전했다.





“옥상 담배 친구, 잘 가시고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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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의원회관에서 20여년 간 근무한 '구두 아저씨' 고(故) 정순태(63)씨를 추모하기 위해 여야 보좌진 협의회가 그의 사무실(구두수선실) 앞에 만든 추모 공간. 국민의힘 보좌진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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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협은 쓸쓸하게 영면에 든 정씨를 추모하기 위해 21일 낮 그가 근무하던 두평 남짓한 사무실 앞에 소규모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곧이어 더불어민주당도 보좌진 협의회 차원에서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이곳에서 여야 보좌진들은 정씨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메모지에 써 붙이며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정씨는 매일 슬리퍼를 신고 일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한 보좌진은 “저 세상에선 꼭 아저씨도 반짝반짝 구두를 멋지게 신으시고 뛰어다니시길 기도할게요”라고 쓴 메모지를 붙였다. ‘1002호’에 근무 중이라는 또 다른 보좌진은 “‘구두 아저씨’ 지난 20여년 간 저희와 함께 반짝반짝 뛸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고 적었고, 또 다른 보좌진은 “제가 신던 모든 구두의 밑창을 전부 갈아 주신 ‘구두 아저씨’ 갑작스러운 부고에 너무 슬픕니다”고 썼다. “우리 옥상 담배 친구, 잘 가시고 평안하세요. 아픈 마음으로 인사합니다”는 메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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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와 김성원 원내수석, 배현진 원내대변인 등이 21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을 찾아 '구두아저씨' 고(故) 정순태(63)씨를 추모하는 모습. 국민의힘 보좌진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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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추모도 이어지고 있다. 21일 오후엔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이곳을 찾아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으로 떠나시기 바랍니다”며 정씨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상희 국회 부의장은 조화를 보냈다.

국회의장 출신의 정세균 국무총리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죄송스럽게 저는 선생님 성함도 모르는군요”라며 “저 역시 늘 선생님의 손길에 구두를 맡겼더랬지요. 말수는 없지만 성실하고 손이 빨라 많은 국회 직원의 믿음을 받아오셨습니다. 정말 열심히 반짝반짝 광을 내주신 덕분에 구두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고 적었다. 이어 “당신께서 베푼 행복의 손길이 우리를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면하소서”라고 덧붙였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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