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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1월25일 승무원의 기지로 납북 피한 KAL기 [오래 전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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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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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25일 경향신문에 실린 대한항공 HL5012 여객기 사진


■1971년 1월25일 승무원의 기지로 납북 피한 KAL기

5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는 경찰이 ‘KAL기 납북 미수 사건’의 배후 및 공범 수사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KAL기 납북 미수 사건은 이날로부터 이틀 전에 발생했습니다.

1971년 1월23일 오후 1시7분 대한항공 소속 HL5012 여객기가 강원도 속초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강릉 상공을 지날 무렵인 오후 1시34분, “북으로 기수를 돌려라!” 1만피트 상공에서 승객으로 가장한 괴한 1명이 폭발물을 들고 협박했습니다. 비행기는 북한으로 항로를 틀었고, 기장의 급보를 받고 출동한 공군기가 위협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다 오후 2시20분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초도리 해변에 불시착했습니다. 당시 비행기엔 승객 55명과 승무원 5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오후 2시23분엔 기내에서 수류탄이 터졌습니다. 이 폭발로 승객 5명이 중상, 11명이 경상을 입었습니다.

비행기를 북한으로 납치하려던 범인은 김상태(당시 23세)였습니다. 군·경 합동수사반은 김씨가 범행에 사용한 폭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등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기사는 “범인 김의 친구인 황모(22), 정모(23), 조모(22) 등 3명의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자기 집에 세든 강모군(20)에게 네 차례에 걸쳐 5000원을 주고 기술을 배워 소형 어선 엔진에서 사용하는 발동기 시동화약(길이 6㎝, 지름 1㎝)과 어린이 딱총용 화약으로 폭발물을 만들었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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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25일 경향신문에 실린 납북 미수 사건 현장 사진들


더 큰 피해를 막은 건 조종사, 보안관 등 기내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이었습니다. 기장의 급보를 받고 출동한 공군이 여객기를 맴돌며 위협 사격을 가하자 범인 김씨가 흥분했습니다. 기내 안전관인 최천일씨는 뒷자석 승객들에게 북한에 온 척 울음을 터뜨리라고 요청했습니다. 슬쩍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김씨를 향해 최씨가 사격을 가했습니다. 김씨가 쓰러지자 수습 조종사였던 전명세씨가 진압하려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도중에 김씨가 들고 있던 폭발물이 터지자 전씨는 자신의 몸으로 폭발물을 덮쳤습니다.

당시 기장이었던 이강흔씨는 경향신문에 수기를 보냈습니다. 이씨의 수기엔 당시의 아수라장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일부 발췌해 소개합니다.

<이륙 20분 뒤 펑하는 폭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순간 조종석과 객석을 막은 안전도어와 보안벽이 박살나고 뒤쪽 플로어(바닥)엔 30~40㎝쯤의 구멍이 뚫렸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세찬 바람은 기체 안을 흰 스모그가 일어난 것처럼 만들었다. 객실 안에는 신문지 종이 부스러기 등이 마구 휘날려 승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시한 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 뒤를 돌아보자 괴한 1명이 조종석으로 바싹 다가와 손에 든 폭탄을 터뜨릴 것 같은 몸짓을 했다.

“당신은 누구요”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물었다. 놈은 상의를 젖혀 어깨에 있는 20㎝쯤의 칼자국을 보이며 외쳤다. “나는 이미 생명을 버려도 좋다는 각오가 돼 있다. 기수를 북으로 돌려라”하고, 놈은 곧 폭탄의 안전핀을 입으로 뽑으며 협박을 계속했다. (중략)

하오(오후) 1시30~32분쯤 우리는 대구 중앙항공관제소에 영어로 “We have highjaker aboard(납치범이 기체 안에 있다)”고 무전 연락을 했다. 또 강릉 관제소에도 “고성능레이더식별기(SIF)를 현재 우리가 날고 있는 고도에 맞추고 계속 우리의 비행을 체크해달라”고 무전연락을 했다. 이어 보안관석에서 인터폰으로 보안관 최씨가 물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겠습니까?”에 “우리는 강릉 속초 간성 중에 불시착할 계획이요”라고 응답해주었다. 범인이 왼쪽 창밖을 내다보며 지상을 확인하자 최씨는 또 “총을 쏠까요”하고 질문을 해왔다.

어쩔 수가 없었다. 쏘라고 할 수도, 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1000피트의 상공에서라도 범인이 사살되어 쥐었던 안전핀을 놓쳐 또다시 폭발물이 터지면 더 이상 기체와 승객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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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25일 경향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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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당시 보안당국의 허술함이 드러났습니다. 13개월 전에도 다른 여객기가 납북된 적 있기 때문입니다. 1969년 12월11일 대한항공 소속 여객기 YS11이 강릉에서 김포로 향하다 대관령 상공에서 납북됐습니다. 이후 보안당국은 안전 운항을 위해 주민등록증 제시, 금속탐지기 검사, 보안관 탑승 등 대책을 세웠습니다.

당시 기사는 납북 미수 사건이 “검문 경찰관이 휴대품 검사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아 빚어졌다”고 했습니다. 김씨가 갖고 탄 검은색 비닐 가방에 사제 폭발물이 들어 있었는데, 이 폭발물을 기내까지 가져갈 수 있었다는 건 제대로 검문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금속탐지기의 문제도 지적했습니다. 기사는 “대한항공이 69년 납북 사건 이후 문틀형 흉기탐지기 20대를 도입하고도 안전이 가장 염려되는 접적지역에는 1대도 배치하지 않았다”며 “속초공항에 배치된 금속탐지기는 구형이라 비닐이나 기름종이 등으로 싸면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낡은 장비를 접적지역 내의 공항에 배치했다는 것은 당국의 큰 실수로 지적된다”고 했습니다.

1971년 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1969년 납북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YS11 여객기 탑승자 50명 가운데 39명을 1970년에 송환했습니다. 하지만 승객 7명, 승무원 4명 등 11명은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지난해 2월13일 “가족들이 사랑하는 이들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불확실성 속에 50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렸다는 점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탁지영 기자 g0g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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