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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나발니 석방하라” 영하 50도 뚫고 분노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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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극물 테러 당했던 푸틴의 정적, 체포될 줄 알면서도 러시아 귀국

모스크바 4만명 몰려 10년새 최다, 60개 도시서 시위… 3100명 연행

독일·프랑스 도시서도 연대시위… 美·EU도 “즉시 석방” 푸틴 압박

조선일보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왼쪽)가 지난 16일(현지 시각) 독일에서 공개한 사진. 나발니가 아내 율리아와 찍은 이 ‘셀카’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 찍은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발니는 지난해 8월 옛 소련이 개발한 독극물인 노비촉 공격을 받고 독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고, 17일 모스크바로 귀국하자마자 당국에 체포돼 구금됐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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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6500㎞ 떨어진 서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러시아 전역의 60여 도시에서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45)를 석방하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반(反)정부 시위가 잦은 러시아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려운 시위 열기다.

나발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정적(政敵)이다. 그는 지난해 8월 러시아 정보기관의 독극물 테러를 이겨내고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독일에서 5개월간 치료받고 지난 17일 모스크바로 귀국하자마자 체포됐다.

로이터통신은 모스크바 시내에서만 최소 4만명이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나발니를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푸슈킨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는 “푸틴은 물러나라”고 외쳤다. BBC는 모스크바에서 최근 10년 사이 벌어진 가장 큰 시위였다고 했다. 시베리아의 야쿠츠크에서는 기온이 영하 50도로 떨어졌지만 300여명의 시위대가 거리에 나왔다. 러시아 당국은 코로나 확산 위험을 들어 모든 지역 집회를 불허하고 참가자들을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시위 물결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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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시각 1월 23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가 벌어졌다. /트위터


러시아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를 진압했다. 시위 참가자가 머리에 피를 흘리거나, 경찰이 시위대를 구타한 뒤 끌고 가는 장면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나발니가 갇혀 있는 모스크바의 ‘마트로스카야 티쉬나 교도소’ 앞에서도 수백 명이 행진하며 나발니를 응원하다가 경찰에 끌려갔다. OVD라는 민간 단체는 모스크바에서만 최소 1200명 연행된 것을 포함해 러시아 전역에서 적어도 3100명이 연행됐다고 집계했다. 푸틴의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460명 이상이 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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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러시아 St. 페테스부르크시에서 벌어진 나발니 석방요구시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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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시위./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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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열린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경찰바리케이트 앞 눈밭에 앉아있다./TASS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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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은 소셜 미디어로 집회 참여를 독려했다. 이날 러시아 전역에서 휴대전화 통화나 인터넷 접속이 원활하지 않았는데, 러시아 당국이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고의로 벌인 일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런 시위가 벌어진 것은 체포될 줄 알면서도 “무조건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며 귀환한 나발니의 용기에 많은 러시아인들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변호사인 나발니는 호소력 있는 연설을 하는 장기를 갖고 있다. 최근 그를 떠받쳐주는 버팀목은 유튜브다. 그의 유튜브 구독자는 593만명에 달한다. 작년 8월 독극물 테러를 당했을 때와 비교해 구독자가 180만명 이상 늘어났다. 나발니가 체포된 지 이틀이 지난 19일 그의 동료들이 “푸틴의 11억유로(약 1조4700억원)짜리 호화 저택”이라며 공개한 폭로 영상은 나흘 동안 7678만회 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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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 시민들이 23일(현지 시각) 시내 광장에 모여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하고 있다. 이날 러시아 전역 60여 도시에서 나발니 석방 요구 시위가 벌어졌다. 로이터통신은 모스크바 시내에서만 최소 4만명이 참가했다고 전했고, BBC는 모스크바에서 최근 10년 사이 벌어진 가장 큰 시위였다고 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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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선 푸틴의 종신 집권 야욕이 구체화된 것과 맞물려 나발니 인기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7월 러시아 정부는 2024년까지가 임기인 푸틴이 2036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도록 개헌을 했고, 한 달 후인 8월 나발니를 독극물로 제거하려고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다.

서방 국가들도 나발니 석방을 요구하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나발니는 즉시 석방돼야 한다”고 했고,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시위에서) 연행된 모든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러시아 당국에 촉구한다”고 했다.

러시아뿐 아니라 이날 베를린에서 2000여명이 참가한 것을 비롯해 파리,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뮌헨 등 독일과 프랑스 주요 도시에서도 나발니 석방을 요구하는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EU 의회는 나발니를 석방하지 않으면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해저 천연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 공사를 중단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민감해진 러시아 외무부는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은 다른 나라 내정에 간섭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시위는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예정이다. 나발니 측은 다음 주말인 30~31일에도 대규모 시위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나발니는 2014년 사기 혐의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으며, 러시아 당국은 귀국한 그를 체포한 이유로 수사기관에 출두해야 하는 등의 집행유예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오는 29일 법원이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실형으로 전환할지를 결정할 예정인데, 나발니를 장기간 투옥시키는 결정이 나올 경우 30~31일 예정된 시위가 더욱 거세질 가능성이 있다.

☞알렉세이 나발니

러시아의 변호사이자 대표적인 반(反)체제 정치인이다. 32세이던 2008년 푸틴 대통령을 겨냥한 블로그를 개설해 반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금융 분석에 밝아 푸틴 측 부정부패 증거를 다수 포착해냈다. 2012년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포함됐다. 2013년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27%를 득표해 돌풍을 일으켰다. 2018년 대선 출마를 준비했지만 러시아 선거관리위원회는 과거 그의 전과를 문제 삼아 입후보 자격을 박탈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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