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15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성추행 드러낸 장혜영의 용기

댓글 3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누구나 성폭력 피해자·가해자 될 수 있어

존엄 회복, 일상 돌아가려 공개 문제 제기”

성추행 김종철 정의당 대표 사퇴

김 대표, 저녁식사 뒤 부적절 접촉

당홈피·SNS “배신감, 당 해체하라”

안희정·오거돈·박원순 이어 충격파

중앙일보

장혜영


성평등·젠더 문제에 가장 진보적 목소리를 내온 정의당이 김종철 당 대표의 성추행 사건으로 창당 9년 만에 최대 위기에 처했다. 정의당 젠더인권본부장인 배복주 부대표는 25일 오전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매우 부끄럽고 참담한 소식을 알려드리게 됐다. 김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다”며 “피해자는 당 소속 장혜영(사진) 의원이다”고 밝혔다. 그는 “피해자 실명을 공개한 것은 장 의원의 결정이고 그것을 존중했다”고 부연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이어 진보 진영에서 또다시 발생한 성 비위 사건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충격파가 크다.

회견 이후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문이 잇따라 공개됐다. 먼저 장 의원은 “정치적 동지이자 신뢰하던 당 대표로부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당한 충격과 고통은 실로 컸다”고 밝혔다. 이어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공개적인 책임을 묻기로 마음먹은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면서 “피해사실을 감추고 살아간다면 이 사건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이라고 했다. 장 의원은 또 “‘피해자다움’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여성도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가해자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이전까지 훌륭한 삶을 살아왔거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라도 예외는 없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명백한 성추행의 가해를 저질렀다. 피해자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며 “정의당 대표단 및 당기위원회에 저에 대한 엄중한 징계를 요청드린다”는 입장문을 냈다.

둘의 입장문과 배 부대표 회견을 종합하면, 사건이 벌어진 건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저녁식사 직후였다. 식사 자리엔 둘뿐이었다. 김 대표는 입장문에서 “이 자리는 제가 청해 만든 자리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차량을 기다리던 중 피해자가 원치 않고 전혀 동의도 없는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행했다”고 밝혔다.

배 부대표는 “사건 당일 장 의원이 김 대표에게 항의했고 김 대표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이후 장 의원 측에 ▶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성폭력 예방교육을 이수받겠으며 ▶정의당 당기위원회에 스스로 제소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장 의원 측은 ‘셀프 제소’ 방식이 아닌 대표단 회의를 거쳐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장 의원이 배 부대표에게 사건 발생 사실을 알린 건 사흘 뒤인 18일이었다.

젠더 폭력 근절 외쳤던 김종철 성추행 … 정의당 “참담하다”

중앙일보

김종철 정의당 대표(오른쪽)가 같은 당 장혜영 의원(왼쪽)을 성추행한 사실을 인정하고 25일 사퇴했다. 사진은 지난 4일 회의 모습. [중앙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배 부대표는 수차례에 걸쳐 양측을 비공개 조사한 뒤 25일 오전 당 대표단 회의에 사건 경위를 보고했다. 그 사이에 연 2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 대표는 “사회의 성적 권력 구성은 압도적으로 여성에게 불리하게 조성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며 성평등을 강조했다.

25일 성추행 사건 소식을 처음 접한 대표단 회의 분위기는 “많이들 놀랐고 참담해했다”(정호진 수석대변인)고 한다. 정의당은 이날 곧바로 김 대표 직위해제 및 당기위 제소를 결정했고, 김윤기 부대표가 직무대행을 맡기로 했다. 하지만 선출 3개월 만에 당 대표 하차로 정의당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정의당 홈페이지에는 “창피해서 당원을 못 하겠다. 배신감을 느낀다” “다른 정당도 아닌 정의당에서 가해자가 당 대표라는 사실이 참담하다” 등의 비판 댓글이 이어졌다. 정의당 소셜미디어에는 “당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가해자인 40대 김 대표와 피해자인 30대 장 의원은 20대인 류호정 의원과 함께 ‘포스트 심상정 체제’의 중심을 이루는 트로이카였다. 고(故) 노회찬 대표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 당직 선거에서 배진교 의원을 제치고 대표로 선출됐다. 2019년 10월 영입인사로 정의당에 합류한 장 의원은 류 의원과 함께 김종철 체제의 핵심을 이뤘다.

성평등과 젠더 문제는 이들이 ‘민주당 2중대’ 논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 내세운 핵심 정체성이었다. 이 때문에 지난해 7월 성추행 논란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조문을 장 의원이 거부했을 때도 김 대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정의당이 외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 정의당에서 당 대표가 성 비위로 사퇴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더 컸다. 정 수석대변인은 일단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분간 정의당은 김윤기 직무대행체제가 유지될 전망이다. 정 수석대변인은 “김 대표의 임기가 상당히 많이 남아 당규에 따라 당 대표 보궐선거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있어서는 안 될 성추행 사건이지만, 은폐나 책임 회피 등으로 흐르는 여느 권력형 성범죄와는 전개 과정이나 문제 해결 방식이 달랐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장 의원이 스스로 피해자 신분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일상화된 성범죄를 사회가 직시해야 한다고 한 대목은 울림을 줬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국회의원조차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용기 있게 고백한 것 자체가 수많은 피해자에게 용기를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 의원은 입장문에서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직시해야 하고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익명을 원한 한 여성단체 인사는 “장 의원의 외침은 성범죄에서 ‘가해자=악마’ ‘피해자=미약하고 슬픈 존재’라는 단순 도식을 넘어서 피해자가 어떻게 일상을 회복하고 가해자에게는 어떻게 정당한 책임을 지울 것인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고 했다.

■ 장혜영 의원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다니던 2011년 11월 당시 무한경쟁을 비판하는 ‘이별 선언문’이라는 대자보를 학교에 내걸고 자퇴하면서 화제가 됐다. 이후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 장혜정씨의 자립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을 제작했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