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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원칙 깨버린 박원순 사건, 신뢰 복원의 길은 다시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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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 노동·지침 무력화…‘박원순 사건’이 남긴 과제들

가해자 지위 따라 달라진 성폭력 대응 원칙

피해자보호·진상규명 원칙 따를 거란 믿음 복원해야


한겨레

지난해 7월15일 서울의 한 대학 도서관 앞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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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업무와 관련하여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서울시 등 관계기관에 피해자 보호 및 재발방지를 위한 개선 권고를 결정했다.”

25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지난해 7월 말부터 진행한 직권조사의 결과다. 피해자가 국가기관으로부터 ‘성희롱이 있었다’는 판단을 받기까지, 한국 사회는 무수한 갈등과 혼란을 비용으로 치러야 했다. 여성 비서에게 떠넘겨진 ‘심기 노동’은 결국 지자체장의 성희롱으로 되돌아왔다. 마련된 대응 지침은 작동하지 않았고, 피해자는 ‘피해자’로 규정조차 되지 못한 채 ‘2차 피해’ 속에 내몰렸다. ‘박 전 시장 사건’과 같은 권력형 성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한국 사회에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야 하는 이유다.

여성 비서에게 떠넘긴 ‘심기 노동’…성희롱에 취약한 구조 드러나

피해자의 직무 배치와 업무는 남성 상급자의 ‘심기 노동’을 여성 하급자에게 떠맡기는 성차별적인 조직문화를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서울시 내부에서는 시장실 비서실 선발이 암묵적으로 성차별적 인식에 기대 이뤄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 시장실 여비서는 단정한 외모에 미혼의 경력이 짧은 꽃같은 아가씨 공무원들이 담당했다.…누가 봐도 젊은 여성들이 분위기를 띄워간 사무실의 꽃역할을 담당하기를 기대하는 구조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업무처리 중심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이 인력배치가 고 박원순 시장 재임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서 말이다.”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서 대독된 서울시 공무원 발언)

서울시는 이렇게 선발된 시장실 비서에게 시장에 대한 ‘심기 보좌’, ‘감정수발’을 요구했다. 서울시장실에서 1년 정도 근무한 전직 서울시 직원은 <한겨레>에 “시장이 피로해 할 때는 그를 달래고 응원하는 역할이 이들(여성 비서)의 몫이었다”, “시장에게 얼마나 살갑게 대할 수 있는지가 암묵적으로 ‘비서’란 직무에 대한 역량 평가 기준으로 작용했다”고 증언했다.

한겨레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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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의 ‘심기’를 업무대상으로 삼는 노동은 결국 직무의 경계를 넘는 사적 노무, 나아가 성희롱으로 이어졌다. 피해자는 시장이 마라톤을 뛰거나 취침을 한 뒤 벗어놓은 속옷을 치우고, 시장이 쓰고 난 휴지와 치간 칫솔·치실 등을 직접 치우는 일을 했다. 박 전 시장은 피해자가 비서실에서 근무한 지 1년이 지난 뒤부터는 “야한 문자, 속옷 차림의 사진, ‘냄새 맡고 싶다’ ‘사진을 보내달라’ 등의 문자”(서울중앙지법 판결)를 보내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지속해서 인사이동을 희망했지만 4년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상사의 심기가 제일 중요한 업무대상이 되다 보면, 상사가 부당한 행동을 했을 때 자기 선에서 이를 피하거나 제지하는 것이 업무상 금지된 행동이 되어버린다”고 지적한다. 여성 하급자가 상사의 심기 관리를 맡는 조직문화는 필연적으로 여성 하급자를 성희롱에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인권위는 서울시에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비서실 업무 관행 개선”을 주문했다. 서울시 성희롱성차별 근절 특별대책위는 지난달 10일 발표한 대책에서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들도 일반 직원과 마찬가지로 희망전보 절차를 통해 선발하고, 공적 업무를 벗어나는 사적 노무 지시는 원칙적으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박원순’ 앞에 무력한 성폭력 대응 지침

박 전 시장 사건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성폭력 피해자가 대응 지침에 따라 누려야 할 최소한의 보호조치가 사건 초기부터 무너졌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시와 정부 여당 등이 피해자를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고, 박 전 시장의 사망으로 진상규명이 불필요해졌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 건 광범위한 ‘2차 가해’를 용인하는 효과를 낳았다.

‘피해자 규정’은 수사나 조사를 통해 진상규명을 하기 전까지 고소인이나 신고인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방어막 역할을 한다. 김혜정 부소장은 “전문성을 가진 기관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신고인을 ‘피해자’로 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룰’이 지켜져야만 권력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가 가까스로 보호된다. 하지만 여당과 서울시 등이 ‘피해자’라는 위치 자체를 부정하면서 2차 가해가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박 시장 사망 6일 뒤인 지난해 7월15일 외부전문가가 차단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할 계획을 밝히면서 피해자를 ‘피해호소직원’이라고 지칭했다. 서울시는 2020년 4월 비서실 성폭력 사건까지는 ‘피해자’, ‘가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미투’ 폭로에서는 사건 초기부터 ‘피해자’라고 지칭했던 더불어민주당도 박 전 시장 사건의 피해자는 ‘피해호소인’ 또는 ‘피해호소 여성’이라고 불렀다.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관련자 징계 등 피해자 보호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여성가족부는 7월28~29일 이틀간 서울시 현장점검을 가진 뒤 “최근 사건 피해자에 대한 구체적 보호지원 방안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여론이 들끓던 초기 한 달 사이, 박 전 시장과 가까운 정치인들과 전·현직 서울시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2차 가해’는 별다른 보호막 없이 피해자에게 쏟아졌다.

‘대응 지침’에 규정된 것도 박 전 시장 사건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2018)은 성희롱·성폭력의 주체를 ‘행위자’로, 객체를 ‘피해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매뉴얼엔 기관장이 “피해자보호 및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고, 관리자는 “공식적인 결과가 나오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피해자보호를 위한 조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박 전 시장 사건은 지자체장이 가해자일 경우 상급기관이 없고, 피해 사실을 신고할 통로가 마땅치 않다는 문제도 드러냈다. 인권위는 “지자체장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자원, 권력과 피해자와의 불균형 정도가 심하여 내부 성희롱 고충처리시스템을 이용할 경우, 비밀 유지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전문성을 갖춘 외부 단위에서 사건조사를 전담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가해자 업적·세력에도 원칙 따른다는 믿음 복원해야

“‘박 시장이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통상적인 성폭력 사건 대응의 규칙을 완전히 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 전 시장 사건을 두고 여성계에서 나오는 탄식이다. 성폭력 사건 대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박 전 시장 사건이 부른 심각한 피해 중 하나는 가해자의 정치적 지위가 높으면 권력형 성범죄 피해에 대한 구제 절차가 왜곡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불신을 낳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한국 사회에 주어진 과제는 가해자의 사회적 업적이나 정치적 지지세와 무관하게 성폭행 사건 대응은 법과 제도에 규정된 ‘피해자보호’와 ‘진상규명’이라는 원칙 아래에 절차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럴 분이 아닌 분’은 없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박 시장은 9년 동안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 피해자는 하위직급 공무원으로, 이러한 위계와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조직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었다. 본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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