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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현장에서]기재부의 나라도, 민주당의 나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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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재난지원금 이어 손실보상법 놓고 당정간 갈등

대권 잠룡들 이재명·정세균 등 기재부 때리기 나서

세부안 없는 2월 입법 강행, 국민 기대만 부풀릴수도

국가채무 급증세…건전성 고심은 나라 곳간지기 소명

[세종=이데일리 이명철 기자] “여기가 기재부의 나라냐.”

“여기가 차붐(차범근)의 나라입니까?”라던 미하엘 발락(전 독일 축구 대표팀 선수)처럼 동경 어린 질문이 아니다.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정세균 국무총리 등 범여권 인사들이 기획재정부를 압박하며 던진 발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불거진 경제위기속에서 여당내 대권주자들이 잇따라 기재부 때리기에 나섰다. 타격 지점은 최근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에서 자영업자 영업손실 보상 제도화(손실보상법)로 옮겨갔다.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를 지원할 법을 만들자는데 예산을 담당하는 기재부가 난감해 하자 이렇게 압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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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오른쪽) 국무총리가 지난달 9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회의에 앞서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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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 발표하면 끝? 의미 퇴색한 당정협의

지난 1년간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정책 결정 과정을 돌아보면 정치권과 정부(기재부)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정치권이 정책 골격을 내놓으면 기재부가 난색을 표하고 다시 여당의원들이 핏대를 올리며 정부를 압박해 여당안을 관철하는 그림이 반복됐다.

지난해 상반기 1차 긴급재난지원금 논란이 딱 그랬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선별 지원 입장을 유지했지만 여당 중심 정치권은 전국민 지원을 주장했고 결국 약 14조원을 들여 전국민 대상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세제 정책도 기재부 의견은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양도세를 내야 할 주식 대주주 범위는 당초 올해부터 ‘보유금액 3억원 이하’로 확대할 예정이었지만 정치권 반대에 결국 ‘현행(10억원) 유지’로 물러났다. 이때 홍 부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반려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재부에서는 ‘당정 협의가 무의미해졌다’는 푸념이 나온다. 여당 주도의 정책 결정이 반복되면서 기재부는 당이나 청와대에서 지시를 내려 받아 기획하고 집행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정책 하청업자라는 자조섞인 목소리마저 들린다.

최근 들어선 나라 곳간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밥그릇 싸움이 치열하다. 자연스레 ‘곳간지기’인 기재부는 각계 원성을 들을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정치권이 꺼내드는 만능카드가 ‘국민의 뜻’이다. ‘전국민 기본소득’을 주창하는 이재명 지사는 반대 의사를 보인 홍 부총리를 겨냥해 “이 나라는 기재부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나라”라며 여러 차례 비판했다.

손실보상법 추진을 놓고서는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이 “해외에는 제도화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하자 정세균 총리 또한 “여기가 기재부의 나라냐”며 호통을 쳤다. 그는 기재부를 겨냥해 ‘개혁 저항세력’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결국 홍 부총리는 지난 22일 손실보상법을 두고 “가장 합리적인 제도화 방안이 무엇인지 부처·당정간 적극 협의하고 지혜를 모으겠다”며 심사숙고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다만 홍 부총리의 우려처럼 손실보상법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코로나19 사태 뿐 아니라 앞으로도 다른 상황에서도 자영업자 손실을 정부가 보전해야 하는 것인지 손실보장은 어느정도 수준에서 해야하고 재원은 얼마가 들 것이며 누가 충당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정 총리는 자영업자 손실 보상 규모가 100조원에 달한다는 보도에 대해 ‘악의적’이라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지만 이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상황에서 민주당 의원이 내놓은 추산을 인용했을 뿐이다.

오히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지원 대상은 어떻게 정할지, 그리고 어느 정도 손실을 보전할 지 세부 내용은 마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입법화하겠다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은 섣부르게 국민들의 기대만 부풀리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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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왼쪽 첫번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 참석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24일 고위당정협의회에는 불참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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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나랏빚 후세 부담, 재정당국 소명 지켜야”

정부가 영업금지·제한 조치로 큰 어려움을 겪은 자영업자의 피해를 모른척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정부는 국가채무 급증 우려에도 사실상 5차례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집행하는 등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쳤다. 2·3차 재난지원금의 수혜 대상은 자영업자·소상공인과 고용 취약계층에 집중했다.

절대적인 부채 규모가 다른 나라에 비해 과도하지 않다는 게 추가 재정 지출 확대론자들의 주장이고 팩트지만 문제는 재정 건전성 악화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일반정부 부채(D2)는 810조7000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대비 42.2%에 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부채비율(110.0%)의 절반 이하이며 회원국 33개국 중 6위에 해당하는 수준이지만 2018년(4위)와 비교하면 두계단 하락했다. 1년 새 OECD 주요국에 비해 부채 증가 속도가 더 빨랐다는 의미다.

기재부에 따르면 올해말 기준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대비 47.3%인 956조원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직전인 2016년말(626조9000억원)보다 330조원 가량 늘었다. 연간으로는 65조원씩 늘었는데 전년대비 증가폭은 2017년 33조3000억원에서 올해 109조1000억원으로 대폭 상승했다.

국민 세금으로 만든 재정은 국민이 어려울 때 써야 한다. 방역조치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들의 피해를 외면하라는 것도 아니다. “세금은 그럴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는 국무총리 시절 이낙연 대표의 말은 옳다.

하지만 국민 피해 지원을 위해 재정을 적극 투입하긴 쉬워도 부족한 재정은 결국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지금은 가뭄의 단비일지라도 늘어난 빚을 갚으려면 후세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고정 지출이 필요한 복지 정책 등을 입법화하는데 정부가 신중한 이유다.

홍 부총리는 “과도한 국가채무는 모두 우리 아이들 세대의 부담이고 나중을 위해 가능하다면 재정여력을 조금이라도 축적하는 것도 유념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기재부가 안고 있는 고심을 드러낸 발언이다.

‘기재부의 나라냐’는 비판은 ‘나라 곳간을 기재부 마음대로 주무르지 마라’는 속뜻이 담겼음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기재부는 나라 곳간 지기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홍 부총리는 “제도화 방법, 벤치마킹 입법 사례, 지급 기준, 소요재원 등을 짚어보는 것은 재정당국으로서 의당 해야 할 소명”이라고 했다. 맞는 얘기다.

국회에서 180석(열린민주당 포함)을 가진 여당이라도 항상 ‘국민의 뜻’과 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를 앞둔 지금 같은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가 ‘기재부의 나라’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의 나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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