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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이렇게 고통은 평등해진다[오늘과 내일/박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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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心中 따른 이익공유제

나랏빚 늘자 민간에 기대는 것

동아일보

박중현 논설위원


“코로나가 주는 고통의 무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정부는 고통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것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5일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자영업자·소상공인에게 닥친 경제적 충격을 염려한 것이다. 지난해 10월에도 대통령은 “코로나로 인한 ‘불평등’은 국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고통의 무게가 모두에게 같지 않다”고 했다. 올해 발언이 한층 압축적이고 어감이 강해졌는데 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 지적처럼 코로나19로 인한 ‘K자형 양극화’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수출 대기업, 금융회사 직원들은 수입이 감소하지 않고 재택근무만 많아졌다. 110만 명을 훌쩍 넘은 공무원들 역시 나랏빚이 늘었다고 월급이 줄진 않는다. 650만 명 자영업자 가운데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 주점 노래방 헬스클럽은 폐업이 속출하지만 배달을 많이 하는 치킨집은 매출이 는 곳도 적지 않다. 이미 취업 문턱을 넘은 청년과 코로나 발생 후 일자리를 찾다가 포기하고 ‘그냥 쉬는 청년’의 차이는 단기간에 해소되지 않는다.

맞는 말인데도 고통의 평등, 불평등이란 표현이 낯설었던 건 일반적인 언어습관과 다르기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문 대통령 취임사처럼 평등이란 말은 ‘기회’같이 긍정적인 단어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눠 줘도 아무도 안 반길 고통 뒤에는 ‘나눠서 부담한다’는 ‘분담’이 많이 쓰인다.

행간에 담긴 대통령의 뜻을 먼저 캐치한 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다. 1주일도 안 돼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대표는 “코로나19로 많은 이득을 얻은 계층, 업종이 이익을 기여해 한쪽을 돕는 다양한 방식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고통을 평준화할 방법으로 ‘이익공유제’를 꺼낸 것이다. 자발성, 인센티브를 강조했지만 ‘기업 팔 비틀기’로 귀결될 것이란 점을 너무 잘 아는 대기업, 금융회사, 플랫폼 기업들은 “우린 코로나 수혜 기업이 아니다” “이익을 멋대로 기부하면 배임으로 처벌될 수 있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여당은 2월 중 민간의 기금을 출연받을 방법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 대표가 대통령 심중(心中) 읽기에 성공했다는 건 18일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확인됐다. 대통령은 “그런 (코로나 승자) 기업들이 출연해 기금을 만들어 고통 받는 소상공인·자영업자, 고용 취약계층을 도울 수 있다면 대단히 좋은 일”이라며 “다만 제도화해서 정부가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추진할 순 없지만 당이 나서준다면 고마운 일이란 뜻이다. “왜 40%대인지 근거가 뭔지 알려 달라”는 질문 하나로 기획재정부의 국가채무비율 마지노선을 무너뜨렸던 대통령도 퇴임을 1년 4개월 앞두고 국채를 무한정 찍어내 돈을 쓰는 건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위기 상황이라도 민간의 돈을 이쪽 주머니에서 저쪽 주머니로 함부로 옮기는 건 자유시장경제를 하는 민주국가가 쓸 만한 정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임기 초 2년간 최저임금을 30% 가까이 올린 건 식당 주인, 편의점주의 이익 일부를 종업원, 아르바이트생 수입으로 옮긴 것이다. 주택, 상가 임대료 상한을 제한하는 건 임대인 수입을 세입자에게 옮기는 정책이다. 편의점주, 임대인이라고 여유 있으리란 보장이 없지만 돈 안 쓰고 생색 낼 수 있는 이런 정책들을 정부와 여당은 선호해 왔다. 2월이 지나면 결국 자영업자를 돕겠다며 돈 낼 ‘착한 기업’들이 줄을 설 것이다. 지금 한국에선 고통도 이렇게 쉽게 평등해진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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