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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사라지는 기업공채[횡설수설/이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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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잘하겠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 2019년 초 출간된 ‘공채형 인간’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공채형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룹 공채제도를 가진 우리 대기업들은 대규모로 신입사원을 채용해 수십 개에 이르는 계열사에 배치한다. ‘뭘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그룹이 ‘배분’해주는 인재를 받는 계열사의 현업 부서들도 어떤 인재가 올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SK그룹이 내년부터 신입사원 정기 공채를 전면 폐지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은 2019년, LG그룹은 지난해 정기 공채를 없앴다. 4대 그룹 중에서 삼성만 정기 공채를 유지하는데 전반적인 흐름은 이미 수시 채용 쪽이다. 불과 1, 2년 전까지 삼성직무적성검사(GSAT) SK종합역량검사(SKCT) LG인적성검사 등에 응시하는 인원이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보다 많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대규모 공채는 입사 기수 문화의 뿌리다. 연공서열이나 종신고용과 함께 1960년대 일본에서 들어온 고용의 틀이다. 수시채용이 보편화하면 기수 문화에도 균열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는 2019년 경단련의 권고로 수시채용이 확산되고 있지만 속도는 느린 편이다. 여전히 4월 기업설명회, 8월 면접, 11월 내정(합격)의 절차를 따르는 기업이 80%를 넘는다.

▷주요 대기업들의 공채 폐지 움직임에 취업준비생들은 걱정이 앞선다는 반응이다. 채용 규모가 줄지나 않을까 해서다. 기업들은 수시로 전환해도 채용 인원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채용 방식보다는 경영 여건이 채용 규모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얘기다. 한편으론 수시 채용이 취업 준비 부담을 더는 측면도 있다. 서류전형을 통과하려고 스펙 쌓기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고, 1년에 한두 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하는 공채보다 기회가 많아질 수 있다. 여러 적성·역량 검사도 취업준비생에게 부담만 줄 뿐 업무에 별 도움이 되진 않는다고 한다.

▷현대차가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애플이나 구글과 경쟁하는 시대다. 산업화시대의 유산인 공채는 점점 사라질 운명이다. 다만 인재를 싹쓸이하는 대기업들이 수시 채용을 핑계로 시장이 만들어놓은 인재를 가져다 쓰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기업이 대학과 손잡고 맞춤형 인재를 만드는 ‘계약학과’를 늘리고, 채용 연계형 인턴 등 일 경험을 쌓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수시 채용 때도 알음알음으로 뽑지 말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세계 1등만 살아남는 시대에 인재 한 명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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