㉗청산되지 않은 재판 개입
MB가 임명한 신영철 대법관
광우병 촛불 재판 개입 드러났지만
탄핵 무산 뒤 6년 임기 무사히 마쳐
양승태 사법부도 버젓이 재판 개입
직권남용·비밀누설 기소된 판사들
면죄부 받고 “무죄인데 탄핵은 곤란”
범죄 아니어도 헌법 위반은 확인돼야
2015년 2월17일 임기를 마친 신영철 대법관이 퇴임식이 끝난 뒤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2019년 사법농단 의혹으로 기소된 박병대 대법관(맨 오른쪽)과 고영한 대법관(오른쪽 둘째)이 신 대법관을 배웅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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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되지 않은 행위는 반드시 반복됩니다. 우리 국회는 지난 2009년 11월6일 발의된 신영철 전 대법관의 재판 개입 행위에 관해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키지 못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취임하고 사법농단이 시작됐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법관 탄핵소추 발의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난 2월4일 국회 본회의장. 사법농단 실마리를 드러냈던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탄핵소추안을 제안·설명했다. 임성근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하던 2014년 2월~2016년 2월, ‘세월호 7시간 명예훼손 재판’ 등 세 건의 형사 재판에 개입했다. 헌법을 위반한 판사를 헌법재판에 회부할 권한과 의무는 국회에 있다. 이 의원은 국회가 그 의무를 저버렸던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 사례를 언급하며 이제라도 “국회는 국회의 의무를 다하고, 헌법재판은 헌법재판소에 맡기자”고 했다. 찬성 179표(재석 288명, 반대 102표, 기권 3표, 무효 4표)로 발의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웃으면서 떠난 신영철
사법행정은 인사·회계·예산 등 재판 제도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행정작용을 말한다. 이 권한을 손에 쥔 사법행정권자의 재판 개입은 이미 2009년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뒤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참가자 1400여명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신영철 대법관은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었다. 그는 “집중 배당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보편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일선 판사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사건을 한곳으로 몰아 통일된 결론을 도출하자는 취지로 배당부터 선고 방향까지 제시하며 재판에 개입한 것이다. 대법원 진상조사단은 신 대법관이 재판 내용과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17개 법원에서 판사회의가 열렸고 500명에 가까운 판사들이 “신영철 대법관의 당시 행위는 재판권 독립을 침해했다”는 데 뜻을 모았다. 2009년 11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 5당과 무소속을 포함한 의원 105명이 발의한 ‘신영철 대법관 탄핵소추안’은 국회 본회의에 보고된 지 72시간 안에 표결이 이뤄지지 않아 폐기됐다. 그는 대법관 임기(6년)를 채우고 웃으면서 퇴임했다.
10년 새 비슷한 진통을 겪으면서도 재판에 대한 사법행정권의 한계를 연구한 법원 안팎의 결과물은 거의 없다. 전직 대법원장까지 구속기소되고 나서야, 법원은 형사재판이라는 가장 극단적 방법으로 그 경계선을 그어나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신영철’이라는 이름 석자는 사법농단 재판에 때때로,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 기소된 전·현직 판사 14명의 공소사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과거의 교훈이 당연한 직업윤리로 체화되지 못한 흔적이 재판 곳곳에 드러나서다.
재판 개입사태 후속조처 어디에
재판을 받는 사람은 판사를 고를 수 없다. 업무 분담의 형평성 등 최소한의 합의된 원칙을 제외하고 사건은 재판부에 무작위 배당되고, 이는 공정한 재판의 출발점이다. 이 대원칙이 깨졌다는 점에서 2015년 발생한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배당 조작은 2009년 신영철 사건과 겹쳐진다. 2015년 심상철 당시 서울고법원장은 통진당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 배당에 대법원 법원행정처 의중을 관철시켰다는 의혹을 받는다. 심 전 원장은 ‘미제 사건이 적은 재판부에 법원행정처가 사건을 배당하려나 보다 생각했지, 법원행정처의 의도나 구체적인 사건 배당 경위는 알지 못한다’고 맞섰다.
신영철 재판 개입 사태를 겪은 뒤 대법원은 2009년 9월 법원장의 특례배당권을 축소하는 쪽으로 예규를 개정했다. 배당권을 악용한 법원장의 재판 개입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2021년 1월28일에 열린 심 전 원장 재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신문을 통해 당시의 배당 논란을 물었지만 심 전 원장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저는 (당시) 고등법원에 근무할 때여서 지방법원의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 너무 오래된 얘기이지 않습니까.” 검사가 되물었다.
“그때 전국 단독판사회의가 개최됐고 신영철 대법관의 위법행위로 재판 공정성과 국민 신뢰가 심각하게 저하됐으므로 사퇴하라는 의견도 단독판사회의에서 나왔는데요.”(검사)
“그 이야기는 모르고요. 신영철 대법관이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것은 신문 보도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심 전 원장)
“특례배당이 가능한 사례를 업무상 관련 재판이나 업무상 부담과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로만 (예규를) 개정했는데요.”(검사)
“이 사건 수사된 이후 알게 됐고 배당예규 당시 개정 상황은 제가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이 아니어서 그런 내용을 제가 기억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 수사로 인해 확인해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신영철 대법관 사태를 언론을 통해서든, 주위 법관을 통해서든 지켜본 피고인은 이 통진당 사건의 배당 여부가 법관 독립을 중대하고 명백하게 침해한 행위로 위법하다,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다는 걸 인식하지 않았습니까.”(검사)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적절하지는 못하지만, 당시 (법원행정처가) 신속하게 사건을 심리할 재판부를 희망하는 취지라고 인식했습니다.”(심 전 원장)
신영철 사건에 따른 후속조처를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무죄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피고인 입장에서 신영철 재판 개입 사건을 반성적으로 반추할 여유는 없어 보였다.
신영철 재판 개입 사태가 터지자, 당시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행정처 심의관 5명과 일선 판사 7명으로 구성된 ‘제도개선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법관 독립 침해의 구체적인 유형과 기준, 사법행정권의 한계를 논의했다. 그 결과 “직접적인 요구는 아니더라도 조언·암시·권유 등 간접적 방법을 통해 사실상 특정한 결론을 유도”하거나 “구체적 재판 진행에 관해 언급하는 행위”는 상급자의 재판 관여라고 의견을 모았고, 이를 모아 ‘법관의 독립 침해 사례, 기준, 대응 방안’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사법농단 피고인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자의적으로 이 보고서를 인정하면서도 직권남용 무죄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에 개입할) 직무감독 권한 자체가 없기 때문에 지위를 이용할 불법행위에 해당할지언정, 직권남용죄 성립의 여지가 없습니다.”(2020년 7월17일, 고영한 전 대법관 변호인)
잇따른 무죄 판결로 호도되는 탄핵
지난달 19일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은 신광렬 부장판사는 ‘사법농단 법관 탄핵이 추진 중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기자들이 묻자 이렇게 답했다.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탄핵이라는 것은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는 법관 비리 의혹을 은폐하기 위해 ‘정운호 게이트’ 수사 관련 정보를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됐고, 1·2심 연이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형사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은 사법농단 의혹의 당사자로 하여금 억울함을 주장하는 근거처럼 인용된다. 그러나 형사재판이 형법상 범죄에 초점을 맞춘다면, 헌재의 탄핵 심사는 법관이 직무집행 과정에서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경우 공직에 적합한지를 따지는 절차다. 그 과정에서 헌재는 어떤 행위가 재판 개입에 해당하는지 정의하고 판단하게 된다. 당연한 상식 정도로 여겼던 독립적이고 공정한 재판, 판사의 직업윤리가 탄핵심판 과정에서 그려질 수 있을까.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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