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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바이든은 믿지만, 미국 유권자들은 못 믿는다” [김진호의 세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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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미·유럽의 관계회복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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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실시간 비디오방송으로 뮌헨 안보회의에 참석, 연설을 하고 있다. 방송 중(On Air) 표시가 앞에 보인다. 워싱턴 |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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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취임 이후 ‘결속’에 공들여
‘보건·기후변화·핵’ 공동대응 약속

“앙겔라(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하게 돼 기쁘다. 2년 전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돌아올 것이라고. 미국이 돌아왔다. 대서양동맹 역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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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 온라인으로 열린 뮌헨 안보회의 연설 앞부분에 강조한 말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상원의원으로, 부통령으로, 또 민간인 자격으로 참석해온 바이든 대통령에게 뮌헨 안보회의는 그가 대서양주의자를 자처하는 근거이자 활동 공간이다. 취임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트럼프 이후’의 국내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코로나19 방역에 분주했던 그에겐 첫 번째 의미 있는 외교적 행보였다. 화상으로나마 동맹국 지도자들과 회의를 한 것 역시 처음이다. 그는 이날 주요 7개국(G7) 지도자들과 비공개 화상 회의를 한 뒤 뮌헨 안보회의에 참가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바이든의 연설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이 직면한 2개의 지정학적 위협과 인류가 직면한 보건·기후변화·핵확산 등 3개의 위협에 대한 공동대응을 강조하는 구조로 돼 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이든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동번영을 가능케 해온 집단안보의 전통을 상기시키며 공동의 위협에 함께 대처하자고 강조했다. 2개의 지정학적 위협은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제기하는 것이다. 지난 4일 취임 후 처음 국무부를 방문, 해리 트루먼 빌딩에서 한 연설에선 야당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구금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위협을 먼저 언급했지만, 이날은 ‘장기적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의 위협을 먼저 짚었다.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목전의 화두는 미·중 갈등이지만, 유럽은 미·중 갈등과 함께 미·러 갈등이 부딪히는 곳이다. 핵무기 및 군사대국인 러시아가 제기하는 전통적 위협과 유로 포퓰리즘의 배후기지로 제기하는 ‘하이브리드 위협’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4차 산업혁명부터 글로벌 팬데믹까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세계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변곡점에 처해 있다면서 동맹 복원을 거듭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흔들었던 나토 조약 5항(집단방위)의 이행을 확약하고 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 러시아와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연장, 세계보건기구(WHO)의 코로나19 백신 공동 구매·배분 프로젝트인 코백스에 40억달러 지원 등 취임 이후 취한 조치들을 나열했다. 이란 핵합의를 재개할 용의가 있음도 강조했다.

대부분 유럽 국가는 ‘환영’ 속에
마크롱 “대미 의존 줄이자” 어깃장
유럽인도 기대보다 불신 더 많아

미국 못지않게 유럽 민심도 변화
마음서 미국과 거리 두기 움직임

하나같이 트럼프 4년 동안 미국의 신발털개(doormat)로 전락했다는 자조감이 팽배했던 유럽이 환호할 조치들이다. 하지만 환영 일색의 반응은 아니었다. 미국이 트럼프 4년을 지내면서 냉·온탕을 오가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면, 유럽 역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한 나라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이라며 나토의 집단안보 공약을 강조하는 바이든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새삼 강조했다. 나토는 “뇌사 상태”라며 유럽이 대미 의존을 줄이고 독자방위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그의 오랜 지론이다. 마크롱은 “유럽의 자율성이 나토를 전보다 더 강하게 만들 것”이라며 미국이 의사결정을 도맡아온 관행에 어깃장을 놓았다. 마크롱의 주장은 국방예산 추가 부담을 꺼리며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려는 다른 나토 회원국들과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미국이 결정하고, 유럽은 따르기만 해온 종래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좌인 것은 분명하다.

바이든이 사이버공간·인공지능·바이오기술을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략적 경쟁에 나설 집단안보의 새로운 분야이자 미·유럽이 협력할 분야라고 강조한 반면, 마크롱은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유럽이 자체 기술을 발전시켜 미국 주도 공급사슬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연합군 창설은 마크롱이 2017년 취임 이후 강조해온 것이지만, 논의가 겉돌고 있다. 러시아와 대치만 할 게 아니라 대화도 해야 한다는 마크롱의 주장 역시 현실 외교에서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상과 현실, 그 사이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존재하는 유럽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가 으름장을 놓았던 주독미군 1만2000명 철수를 백지화하겠다는 바이든의 말을 환영하면서도, “우리(미국과 독일)의 이해가 늘 수렴하는 건 아니다”라며 여지를 남겼다. 바이든 행정부와 미국 의회가 공개 반대하고 있는 러시아·독일 간 노트스트림2 가스관 연결사업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2018년 9월 착공한 이 사업은 2019년 2월 미국의 제재로 중단됐지만 94%의 가스관이 이미 설치된 상태다. 러시아 국영기업 가스프롬이 주도한다. 미국은 가스관 사업이 푸틴 정부에 자금줄이 되는 동시에 현 가스관 경유국인 우크라이나의 피해를 늘리고, 러시아가 향후 유럽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자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반대하고 있다. 독일은 오히려 새 가스관이 러·독 간 의존도를 높여 러시아의 위협을 줄일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미국 의회의 반대는 2014년 크림반도를 병합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 의미도 있지만, 미국산 셰일가스의 판로를 염두에 둔 포석이기도 하다.

미국·일본·호주·인도의 쿼드(Quad)를 중심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대서양동맹 복원을 통해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려는 것이 바이든이 구상하는 세계지도다. 메르켈의 말처럼 동맹 간에도 국익에 따라 이해가 엇갈리는 이슈는 있다. 나토의 핵심 동맹국인 독일의 반발을 방치한 채 미국 입장에서 더 큰 국익이라고 할 바이든의 세계전략을 완성하기는 쉽지 않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노트스트림2 가스관 사업의 타협책을 모색(워싱턴포스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각국 언론은 바이든의 G7 정상회의 및 뮌헨 안보회의 연설을 ‘홈커밍 행사’로 본다. ‘미국 퍼스트’를 내세우며 동맹국에 수모를 안겨주었던 트럼프 시대의 종언인 동시에 바이든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첫 외교무대는 나토의 결속 필요성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불안한 미래를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많은 유럽인들은 ‘바이든의 미국’을 환영한다. 하지만 바이든을 좋아하는 것과, 미국을 신뢰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미국을 바라보는 유럽의 시각은 싱크탱크 유럽외교관계협회(ECFR)가 지난 1월19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이든은 환영하지만, 미국 유권자들은 믿지 못하겠다. 향후 10년 내 중국이 미국보다 강대국이 될 것이다. 유럽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3가지로 요약되는 조사였다. 데이터프락시스·유고브가 작년 11~12월 유럽 11개국 1만5000명을 상대로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57%는 바이든의 당선을 반겼다. 지난 4년간 트럼프와 밀월관계를 유지했던 헝가리, 폴란드 응답자들도 환영했다. 하지만 트럼프를 당선시킨 2016년 대선 이후 더 이상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응답이 32%에 달했다. 특히 독일에선 53%나 됐다. 미국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평균 61%나 된다.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영국에서는 81%가 불신을 표했다. 바이든은 좋지만, 미국은 믿을 수 없다는 모순적인 입장은 바이든이 82세가 되는 다음 대선에서 트럼프의 ‘미국 퍼스트’ 정책이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10년 뒤 중국이 미국보다 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평균 59%가 동의했다. 상대적으로 유럽 정치 시스템이 미국 정치 시스템보다 낫다는 응답은 2년 전 조사에 비해 2%포인트 늘어 48%에 달했다. ECFR은 2003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당시만 해도 낡은 유럽과 새로운 유럽의 구분이 있었다면, 이번 조사에서는 4개의 지정학적 부족이 드러났다고 짚었다. 유럽을 신뢰한다는 응답(35%)과 서방세계를 신뢰한다는 응답(20%)이 과반을 차지했지만, 미국을 믿는다는 답은 9%에 그쳤다. 유럽의 몰락을 믿는 29%와 함께 4개의 부족을 구성한다.

ECFR은 유럽이 미국에 방위를 의존하는 것을 줄이고, 자체 방위력을 키워야 한다는 응답이 평균 67%에 달한 것을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결과라고 평가했다. 역시 미국의 최대 동맹국인 영국에서의 응답이 74%로 가장 높았다. 마크롱의 유럽 강병론이 비록 유럽 정치 무대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일반인들 마음속에서는 이미 미국이 떠나가고 있음을 입증한다. ECFR은 “글로벌 팬데믹의 시대는 감정의 시대이기도 하다. 대중의 정서가 (언젠가) 정책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 중국과의 데탕트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전략적 삼각관계다. 푸틴의 러시아는 시진핑의 중국과는 다른 위협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러시아는 구소련 붕괴 뒤 각각 리버럴한 국제사회 질서에 편입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중·러는 정치 시스템이 다른 것은 물론 이데올로기적으로 같은 배를 타기 어려운 나라라는 인식이 미국과 서방에서 굳어지고 있다. 트럼프가 푸틴의 러시아를 동경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정교회) 가치를 내세우며 탈냉전 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를 온·오프라인에서 흔들려는 푸틴은 이미 미국과 유럽 극우 포퓰리스트들 사이에서 ‘족장’으로 대우받고 있다. 바이든이 되살리려는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맞서는 비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지휘자가 된 지 오래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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