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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자백

만주 독립투쟁, 형무소 인권운동…잊혀진 독립운동가 윤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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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3·1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102주년 삼일절을 맞이해 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추억을 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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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이던 1939년 7월 24일 오후 경성형무소(서대문형무소) 제5공장. 노역하던 조선인 수형자 한 명이 일본인 간수를 흉기로 찌르고 자해했다. 이 소식은 모든 조선인 수형자들에게 곧장 전해졌다. 간수들의 이유 없는 폭행·폭언과 고문이 비일비재했기에 분위기가 술렁댔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 조선인을 때리지 말라." 누군가 소리치자 다른 수형자들도 이에 호응했다. 조선인 수형자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감옥 문을 흔들고 두드렸다. 수형자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는 형무소 전체로 번졌다.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수형자 1122명 중 277명이 참여했다.



일제 형무소에서 인권 운동



일본은 이를 '형무소 소요 사건'이라 불렀다.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수형자들의 난동으로 일대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다고 적혀 있다. 이혜영 화성시 문화유산과 독립기념사업팀 주무관은 "당시 서대문형무소엔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수용되면서 간수들의 폭력과 감시가 더욱 삼엄했다"며 "일본 입장에선 '소요'라고 생각했겠지만, 수형자들 입장에선 정당한 인권 운동이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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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자 카드 속 윤영배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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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의를 이끌었던 사람 중 한 명이 윤영배(1905년 1월~1966년 8월) 선생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수감된 이들에게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수형자의 처우를 개선하라"고 외쳤다. 이 사건으로 윤 선생에겐 징역 2년이 추가로 선고됐다.



만주 조선혁명당의 비서과장



윤 선생은 1905년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 우정면(현 우정읍) 사곡리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화성군은 항일 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 중 하나다. 우정·장안 지역에선 3·1 운동 여파가 이어진 1919년 4월 3일 면사무소 2곳과 경찰관주재소 1곳 등에 불이 나고 일본 순사가 살해되는 등 항일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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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 사건을 담은 그림. 화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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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윤 선생은 1934년 중국 만주로 망명해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혁명당에서 비서과장을 역임했다. 그러다 1936년 10월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잠입하던 중 일제에 체포됐다.

당시 조선일보(1937년 7월 10일 자 2면)는 "1935년 4월 조선혁명당 정무원 비서로 등용돼 그 후 비서과장의 자리에서 최고 집무를 했다"고 윤 선생의 체포 소식을 전했다. "운동자금을 보내라는 편지를 받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3000여 원을 강탈했다", "조선 내 공작위원회(조선혁명당) 조직을 확대·강화시켜 봉기하라는 밀명을 받고 조선에 잠입하다 체포됐다"고 했다.

윤 선생은 이듬해 신의주 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강도살인, 공갈 약탈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형무소의 인권 운동은 그 수감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독립 자금 위해 절도, 광복 후 "죄송하다" 사과



윤 선생은 '전과자'로도 기록돼 있다. 1927년 12월 2일 자 동아일보 5면엔 "(윤 선생이) 절도 혐의로 잡혀 취조를 마친 뒤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2차례 우정면 삼괴양주조합에 침입해 현금 300여 원을 훔쳤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지역에선 윤 선생이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범행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윤 선생은 서당인 실영학숙에서 강사로 일하며 아이들을 가르쳤을 정도로 학식을 갖추고 있었다. 만주로 이주한 지 1년 만에 조선혁명당 간부인 정무원 비서, 비서과장을 역임한 것도 그의 전력을 가늠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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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독립운동자들이 걸었던 '3ㆍ1 만세길'. 경기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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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삼괴양주조합을 찾아 사과한 것이라고 한다. 윤 선생의 후손들과 마을 주민들은 "선생이 '훔친 돈을 독립운동에 썼다'고 작접 밝힌 적은 없지만,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한 만큼 모두 독립자금으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런 윤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기까진 100여년이 걸렸다. 윤 선생 본인이 이런 사실을 일절 알리지 않았고 후손들도 주변에서 듣고 알았을 정도였다. 그의 행적은 화성시가 미서훈 독립운동가 조사·발굴 사업을 진행하면서 확인됐다.

정부는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1일 윤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화성시는 이날 열린 기념식에서 윤 선생의 손자에게 훈장을 전달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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